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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선 Aug 18. 2024

할아버지는 흰 런닝이지

난 개와이씨, 넌 뭐?

 열다섯 살 생일이 지나면서부터 우리 반려견은 부쩍 기력이 약해졌다.  

 거침없이 뛰어오르고 내리던 보통 높이의 계단 앞에서 어물쩍 주저하고, 컨디션이 아주 좋아야 겨우 한 칸 오르기에 성공한다.

 중성화 했지만 천수컷임은 변하지 않아서 언제나 뒷다리를 100도쯤 높이 들고 쉬를 했는데(그것도 양다리를 자유자재로!) 이젠 완전한 평지에서만 세 다리 버티기가 가능하다. 바닥이 약간이라도 기울었거나 돌멩이나 나무뿌리가 있어서 조금이라도 지형이 복합적인 곳에서는 다리를 들려다 옆으로 꽈당 넘어져 머쓱해한다.

 야외 배변 후에는 항상 뒷발바닥거세게 차내서 그 옆에 서 있다간 발에 흙세례를 받기 일쑤였는데 이제는 땅을 별로 밀어내지 못하고 두어 번 차는 시늉만 하고 끝난다.


 아이구, 할아버지....





 지난달에 심장판막증 진단을 받고 2박 3일 입원 치료를 한 노견은 한번 폐수종이 왔었기 때문에 사실 언제 우리 곁을 떠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

 게다가 비록 검사에서 진단으로는 안 나왔지만 쿠싱증후군 전단계로 추정된다. 탈모가 있고 부가 얇아져서 척 라인이 드러나고 평소에 물을 많이 먹고 소변도 많이 본다. 현재는 얼굴과 네 다리, 네 발바닥에만 털이 있다. 

 

 미라 같은 등판이 안쓰러워서 예쁜 옷을 입히기 시작했다. 겨울에는 추울까 봐, 여름에는 말라버린 몸을 보기 슬퍼서 입힌다.

 노견의 최애(사실은 나의 최애) 여름옷은 시원한 기능성 원단으로 만든 개와이씨 런닝이다. 안 입은 듯 가볍고 시원해서 똑같은 천으로 만든 원피스가 있다면 내 것도 사고 싶다.

 조물조물 빨아서 주방 창가에 널어놓으면 금방 마른다. 두 벌도 필요 없는 이유다.


 노견은 자는 시간이 늘었다.

 흰 난닝구(라 불러야 제 맛)를 입고 곤히 자는 모습을 보면 웃음도 나고 가엾기도 하다. 심장약을 먹는 개는 잘 때 호흡수가 중요한데 조그만 갈비뼈가 올라왔다 내려가는 횟수가 1분에 20회 대여야 안심이다. 흥분하거나 갑자기 잦은 기침이 나오면 분당 호흡수가 40회대로 가기도 한다.

 한 달에 한 번 병원에 가서 초음파 검사, 혈액 검사를 하고 약을 받아온다. 증상 변화에 따라 병원에 더 자주 갈 때도 있다.

 

 몸의 노쇠함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갈수록 인지력이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경도인지장애 정도쯤 될까. 멍하게 어딘가를 바라보기도 하고 가끔 가족들을 볼 때도 누군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몰라? 하며 다그치면 뚱하게 쳐다보다가 10초쯤 지나 눈빛이 갑자기 부드러워지며 쓰다듬어 달라고 머리를 들이민다.

 그 몇 초간은 뇌가 일시정지 되는 거 같다.


 다행히 왕성한 식욕은 여전해서, 약 먹이기 힘들다는 남들의 사정 따위일절 알 수 없다. 가루약을 사료에 섞느라 사용한  숟가락까지 싹싹 핥아먹는다.

 아마 우리 개가 그 좋아하는 밥까지 안 먹게 되면 너무 슬플 이다.




  

 나는 추억 할머니같이 가끔 아이들 어릴 적 사진을 찾아보는데 그 곁엔 젊고 야단스러운 우리 개가 같이 찍혀 있다. 격렬게 몸을 터는 순간 찍어서 얼굴이 없어지고 둥그런 털만 보이는 사진은 내가 좋아하는 것 중 하나다.

 지금은 런 강풍로 몸을 털지 못하니 다시 볼 수 없네.

등털도 무성하고 초강력 회전을 보여주던 시절


 우리 할아버지 개가 젊은 시절 부럽지 않게 우렁차게 짖을 때가 있는데 빨리 먹을 것을 달라는 요구다. 아침과 저녁밥이 기본이고 틈틈이 채소나 과일을 조금씩 준다.

 

 걸음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지고  의 산책에도 숨이 차는 리 개.

 소화력과 씹는 힘이 떨어져서 좋아하는 당근, 고구마도 실컷 먹지 못하는 우리 개가 오래오래, 불린 이라도 빨리 달라고 깡깡 짖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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