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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이명선
Oct 12. 2024
기억할 날이 많아져서 인생은 살 만하다
페이스북이 나에게 11년 전 오늘의 소식을
보내
왔다. 마치 심심해서 슬슬 나갔던 산책길에서 아는 얼굴을 조우한 듯 반가운 알림이었다.
11년 전 오늘
은 지금도 타고 있는 우리 차를 처음 받은 날이다. 이웃집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새 차가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나갔다. 아파트 길 건너에 카캐리어에서 내려온 새빨간 차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줌마 빨리 와요, 하고 꼬리를 치는 녀석을 횡단보도 이쪽에 서서 바라보며 좀 당황했던 기억이다.
- 아니, 너무 튀잖아.
브로셔에서 본 것보다 훨씬 윤기 나는 빨간색에 살짝 주눅이 들었다. 딜러는 빨간색으로 하겠다는 우리를 만류했었다.
금방 질릴 수 있다는
이유
였다.
- 글쎄요. 저는 차 안에 있어 정작 내 차 색깔을 못 볼 텐데 그렇게 질릴까요?
- 그러니까 사모님이 차를 타러 가시는 길에 그 색을 보면서 질리는 거죠(?).
다행히 빨간 차
는
우리가 탔던 흰 차, 검은 차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 액션 영화에서처럼
목숨을 건
도
주 같은 걸 한다면 무난한 차에 비해 눈에 띄어 불리하다는 정도가 단점이랄까.
그래도 예전과 달리 요즘은 색색의 차들이 많아 우리의 빨간 차는 가만있어도 수수해지기는 했다.
그 만남의 순간은 생생하지만 그게 이맘때라는 것을 잊고 있었는데 오늘이 우리 올군(애칭)의 생일이구나, 하고 날짜에 형광펜을 쭉 그은 기분이다
.
우리 차는 가을에 더 예쁘다
우리는 인생의 단계를 지나며 기억해야 할 날의 목록을 계속 업데이트한다.
특히 '결혼'은 한 번에 가장 많은 기념일이 생기는 중차대한 일이다. 결혼 전까지는 아무 의미가 없던 날짜들에 갑자기 결혼기념일, 시부모님 생일, 남편 형제의 생일, 조카의 생일, 남편 본가의 기제사날 등등 새로운 이름표가 붙기 시작한다.
아이들이 태어나고부터는 아이들과 관련된 많은 날들이 내 일만큼 중요해졌다.
나는
두 딸의 회사 입사일을
내 맘대로 우리 집
기념일로 등록했다.
큰애는 5월 16일, 작은애는 7월 1일이다. 특히 입사 1주년은 의미가 있으니 작년에 큰애의 1주년을 챙겼고, 내년 7월 1일은 작은애의 입사 1주년 기념일이라고 벌써 적어 놓았다.
앞으로도 정작 본인은 무심할 입사기념일 아침에 '오늘이 입사 n주년이네. 직장 다니느라 수고하는 우리 딸 사랑해' 같은 메시지를 보내려 한다.
우리 가족과 15년 넘게 같이 산 반려견의 생일도 중요한 날이었다. 우리 애견 생일이라고 월초부터 공지를 했고 따로 사는 딸들도 모이곤 했다.
사람들이 즐겁자고 정한 날이었지만 노견도 뭔가 시끌벅적한 분위기에서 온 가족이 돌아가며 자기를 안고 야단법석을 한 게 분명 신났을 것이다.
열다섯 살 생일이 있던 6월 이후 반려견이 몇 달 사이에 우리를 떠나서 이제는 '이별의 날짜'가 추가되었다. 삼우제라든지 49재라든지 이런 것에 별 생각이 없었지만 우리 개의 49재
날을
저장하고 화병에 꽃이 떨어지지 않게 한다.
반려견이
떠난
날 같은 건
우리의 기억에
없다면
더
좋을 것
이다.
그러나 모든
생명은
유한하기 때
문에
관계의
마지막은 반드시
찾아와서
결코
피할
수
없다.
지금은 건강하시지만 언젠가는 양가 부모님의 기일도 네 개나 생길 것이다. 그런 아픈 날일지라도 내가 어떻게 기억하고 그 시간을 보내느냐에 따라 슬픔을 넘는 값진 의미로 승화된다고 믿는다.
또 우리 딸들도 이다음에 내게 그래주었으면 한다.
아무 감동 없이 수동적인 태도로 제사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끝내는 것보다 생전의 추억을 회상하고 내가 받은 사랑에 한번 더 감사하는 하루를 보내는 것이 훨씬 가치 있지 않을까?
앞으로 나의 달력에는 남편의 퇴직기념일도 등장할 것이고, 잘
하면 첫째나 둘째 딸의 결혼기념일, 새 식구가 된 사위의 생일 같은 새로운
숫자
가 적힐는지 모른다.
그냥 월요일, 그냥 수요일 같이 이름 없는 보통날들도 우리가 애정이 담긴 메모와 스티커를 붙이면 특별한 날이 된다.
기억할 날들이 하나씩 우리 안에 편입되는 인생
은 그래서
재미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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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인생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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