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를 탔다가 라디오에서 '요즘 진짜 부자들은 명품 가방 드는 것을 촌스럽게 여기고 신발이나 액세서리 같은 소품에서 부를 드러낸다'는 얘기를 들었다.
'큰 부자'라 해도 자신의 물건 구입에는 돈을 안 쓰는 사람도 많기 때문에 라디오 진행자가 말하는 '부자'는 부자 중에서도 특히 돈을 잘 쓰는 부류일 것이다.
그들이 가방 대신 다른 데에 돈을 쓴다는 얘기가 즐거운 소식처럼 알릴 만한 건지, 그게 방송에서 할 만큼 신뢰성 있는 통계로 나타나는 경향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명랑한 진행자는 마지막 멘트로 '그래도 에르메스 같은 브랜드는 제외라고 하네요'라고 덧붙였다.
나와는 참으로 상관없지만 심심하던 차에, '돈 잘 쓰는 찐부자들'의 경향이 왜 바뀌었을지에 대해 추측해 보았다.
일단, 요즘은 부자라고 볼 수 없는 사람들까지도 명품 가방을 많이 갖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평범한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도 사오 백 하는 가방을 흔히 볼 수 있으니 아우라가 떨어지긴 했다. 조명이 번쩍번쩍하는 매장에서 흰 장갑을 낀 직원이 비밀스럽게 꺼내 보여주고 얼른 올려놓는 그림의 떡이 아니라 실제로 친구가 메고 나온 가방으로서 만나면 '엥? 이걸 그 돈 주고...' 하고 시답잖은 때도 있다.
이렇게 '별로 안부자'들과의 경계가 모호해진 부문의 쇼핑으로는 재미가 없어진 찐부자들이 보다 희소성이 있는 품목으로 넘어간 것은 아닐까.
진짜 진짜 부자가 아니라면 남에게 잘 보이지 않는 것(로고가 잘 안 보여 남들이 비싼 건지 잘 몰라보는 물건)에 큰돈을 척척 쓰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돈 잘 쓰는 찐부자들은 웬만한 가방은 이미 다 샀으니 이제 다른 품목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가방은 동시에 두 개를 들 수 없지만 신발과 액세서리는 멀티풀 하게 여러 개를 신고 두르고 찰 수 있으니 말이다.
소시민이 버스에 앉아 더 이상 명품 가방을 사지 않는다는 찐부자의 심리를 추리하는 게 우습다.
그러다가 나는, 내가 아직 명품 가방에 돈을 못 썼는데 그새 유행이 지나버렸다니 한편으로 섭섭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고 뭔가 돈을 번 듯한 기분이 들었다.
2018년 한 단체가 전국 대학생 3656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10억을 주면 1년 정도 교도소 생활을 할 수 있다'라고 답한 비율이 절반을 넘은 51.39퍼센트로 드러났다. (95% 신뢰 수준에 표본오차 ±1.62% P)
설문조사에 그럴 의향이 있다고 답하는 것과 실제로 선택해서 행하는 것은 차이가 있겠지만 그 결과는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돈을 아무리 많이 준대도 살 수 없는 게 '청춘'인데 젊은이들의 생각이 씁쓸하다는 감성적 비판도 있지만, 그만큼 우리 사회가 살기 힘들다는 반증이라는 자탄이 나왔다.
이 단체가 2년 후인 2020년에 같은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응답자 753명 중 44.62퍼센트가 '10억을 주면 1년간 교도소에 갈 수 있다'라고 답했다. (95% 신뢰 수준에 표본오차 ±3.57% P)
그 후 코로나 3년을 거치고 유례없는 부동산 폭등과 물가 인상, 경기 침체 그리고 여전히 계속되는 사회 불안을 겪는 2025년 현재 청년들의 대답이 궁금해진다. 2018년의 10억과 지금의 10억은 체감되는 크기가 다르기 때문에 '10억에 1년 교도소 거래? 콜!' 하는 응답이 더 적어졌을 것 같다.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예비 시부모가 10억짜리 집을 사 주는 대신 여러 요구사항을 지키라는 데 어떻게 생각하냐는 글을 봤다.
내 입장으로서는 결혼 자금을 지원받지 않더라도 가족으로서 기꺼이 할 만한 내용이 있었고 차라리 결혼을 안 할 망정 절대 하기 싫은 항목도 있었다.
그것은 돈을 어떻게 보느냐는 가치관의 차이에서 오지, 돈을 얼마나 가졌느냐의 차이는 분명히 아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더 가지려고 하는 사람과 거금을 줘도 하기 싫은 일은 억지로 할 수 없다는 사람들은 왜 다를까.
사람들의 의견은 분분했고 결국은 당사자가 선택할 일이다. 그중 이런 댓글이 인상적이다.
- 집 명의를 님 앞으로 해 주는 겁니까? 자기 아들 주는 집이지 며느리 주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렇다, 명의를 내 이름으로 해 준다는 전제를 깔면 '절대 하기 싫은 항목'이 확 줄어든다.
라디오 진행자는 주제를 바꿔 '별일 없이 그냥 쉬는 청년들'이 늘어나서 45만 명이라고 말한다. 이때 '쉰다'는 정의는 구체적인 이유 없이 일을 하지 않고 있거나 구직 의사가 없고 구직 활동도 하지 않는 것을 포함한다고 한다.
진행자는 45만이라는 숫자를 강조하며 호들갑스러운 걱정을 했지만, 몇 살부터 몇 살을 청년이라 한 건지, 45만 명이면 전체 중 몇 퍼센트란 건지 알 수 없어서 심각한지를 모르겠다.
네이버에서 찾아보니 파주시 인구가 45만 명, 5년간 감소된 우리나라 인구가 45만 명이다. 쉬는 청년 45만 명이 심각한 숫자 같기도 했다. 반면에 어느 해의 설날 특별사면 대상자도 45만 명이고 모 영화의 개봉 첫날 관객수도 45만 명이라 하니 그렇게 모이기 힘든 숫자는 아닌 것도 같았다.
네이버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에서 금융자산 10억이 넘는 부자도 45만 명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렇다면 1년을 그냥 쉬느니 10억 받고 교도소에 다녀온다는 답이 나올 수도 있겠다. 눈 딱 감고 1년을 보낸 후엔 쉬는 청년 그룹에서 금융자산 부자 그룹으로 넘어가 있을 테니까.
만약 10억을 당장 준다면 바꿀 수 있는 게 몇 가지 있을 것도 같다.
그래, 내가 아직 안 아프고 남편이 바람 안 났고 애들이 별 탈 없이 사니 이런 생각을 한다.
만약 내 몸이 아파 죽겠고 남편이 바람이라도 나 봐라.
10억 줄 테니 그거랑 퉁치잔들, 되겠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