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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새해에는

by 이명선

친밀했던 한 해가 떠나가고 새로운 한 해가 찾아오는 경계의 날들에 서 있다.

항상 경험하는 해바뀜의 과도기지만 우리나라 안팎이 '다사다난'이라는 말이 턱없이 부족할 만큼 위태로워서 소시민은 매일매일이 심란하다.

어수선한 마음 정리를 할 겸 공간의 정리를 해야겠다.

안 쓰는 그릇을 꺼내 버리려고 수납장을 열었다가 모카포트를 발견했다. 오랜만에 재미로 커피를 끓이려니 휴대용 가스레인지가 필요했다.

발코니의 붙박이장 안에는 지박령 같이 웅크린 짐들이 새삼 눈에 띈다. 이 집으로 이사한 지 3년이 훌쩍 지나도록 쓸모가 없어 꺼내지 않았던 살림들이다.

한겨울이니 발코니 정리는 일단 놔두고 따뜻한 봄의 대청소를 기약한다.

집에서 모카포트로 끓여낸 커피는 맛이 별로 없었다. 쓰고 거친 맛이 주로 났다. 그러나 이것도 우리 집 거실이 아니라 어디 한갓진 캠핑장 마당에서 마신다면 다를 수도 있다.


얼마 전에 홈쇼핑을 보다가 꽤 좋은 프라이팬 세트를 구입했는데 선뜻 풀지 못하고 아껴두었다. 한 해의 마지막 날 원래 쓰던 것들을 싹 버리고 새 팬들로 채웠다. 반짝거리는 새 물건들이 보기에 좋다.

비싼 거 소중한 거 아껴봤자 지금보다 더 나이 들어서 쓰면 빛도 안 난다.



우리 모두 공평하게 살씩 더 먹었다. 나이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나이가 들면서 가장 좋은 점은 젊을 때보다 '세상만사에 자유롭다'는 것이다.

자유롭다는 것은 아량이나 관조 같은 멋진 의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눈치를 보지 않는다, 어쩌면 '뻔뻔해진다'는 사실도 포함한다.

'나이 듦의 자유' 하니 재밌는 일이 생각난다. 몇 해 전 막 스무 살이 된 작은딸과 함께 있을 때였다. 어딜 가는 길이었는데 마침 주변 누군가에게 물어볼 거리가 생겼다. 옆에 청년이 서 있길래 내가 질문을 했고 그가 자상하게 답해 주었다.

잠시 후 우리 둘만 남았을 때 작은애가 말했다.


- 엄마는 좋겠다. 잘생긴 남자들한테 막 말 걸어도 친절하게 대해주니까.


내 멋대로 말을 걸어도 청년들이 경계하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좋은 점임이 확실하다.


또 하나 좋은 점이 있다.

남부럽지 않게 나이가 들어서인지 요즘은 남부러운 일이 별로 없다. 나보다 잘 살아도, 나보다 잘 나가도 '아, 그렇구나, 좋겠다'의 마음이다.

누가 천만 원짜리 외투를 입어도, 신축 아파트에 들어가도 '오, 그렇구나, 좋겠다!'로 순순히 마무리가 된다. 질투의 마음도 정력이 필요하니 힘을 잃어 가나 보다.

백화점에서 멋진 옷을 봐도 '예쁘다, 하나 살까? 그런데 과연 저 값을 하려나' 싶어 지나친다.

노년의 어머니들이 이제는 사고 싶고 없고 갖고 싶은 것도 없다고 하시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짐작이 간다.


아는 카페에 일하러 갔는데 평소보다 손님들이 적었다. 주 고객인 인근 회사들이 연차를 소비하느라 쉬어서란다. 정작 쉬고 싶을 때는 맘대로 휴가를 못 내고 연말연초에 강제로 쉰다고 불평하는 손님이 있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예전에 아이들을 키울 때, 주말에는 학원에 안 보내는데도 맨날 놀 시간이 없다고 하는 아이들의 심리에 대해 전문가가 설명하는 것을 들었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자기들이 놀고 싶을 때 놀아야 노는 것'이지 엄마가 정해준 시간에 학원에 안 가고 쉬라는 것은 진짜로 쉬는 것이 아니라고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 말이 맞다.

회사원도 내가 쉬고 싶을 때 쉬는 게 진정한 휴가일 거다.

손님들이 평소보다 적어서 아르바이트생의 입장에서는 편했다.

새해에는

쓰지 않는 물건과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나의 공간과 시간을 잠식당하지 않겠다.

새해에는

내가 쉬고 싶은 날 쉬고, 내가 울고 싶은 날 울겠다.

이 두 가지만 이뤄도 충만한 한 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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