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옛날에 화목하지만 가난을 면치 못하는 집이 있었어.
어느 날 그 집 큰아들이 혼례를 해서 며느리가 들어왔어. 맏며느리는 아주 현명한 사람이었어.
집안 상황을 파악한 맏며느리는 가족들에게 두 가지를 당부했어.
1. 밥은 정해진 시간에 모여서 먹습니다. 밥시간이 아니라면 시아버지라도 따로 밥상을 차리지 않을 것입니다.
2. 모든 식구는 집에 들어올 때 빈 손이면 안 됩니다. 나뭇가지, 돌멩이 하다못해 개똥이라도 주워오기로 약속해 주세요.
착한 가족들은 며느리의 말을 실천했어. 어린 시동생들조차 집에 들어오다 말고 형수님의 말을 기억하고 다시 나가서 새끼줄 도막, 버려진 숟가락이라도 찾아서 들고 왔어.
식구들이 한 번에 밥을 먹고 치우니 음식 준비와 처리에 낭비가 없었고 집안 여자들은 여러 번 밥을 차리는 대신 소중한 시간에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었지. 며느리는 식구들이 주워온 것들로 땔감도 하고 살림살이를 만드는 재료로도 썼지.
몇 년 후에 그 집은 어찌 됐게? 드라마틱하게 부자가 되진 못 했지만 형편이 훨씬 나아졌을 거라는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
생전에 나의 할머니는 늘 '아껴 써라, 아껴 써라' 했다. 돈을 버는 것은 맘대로 할 수 없지만 돈을 아끼는 것은 마음먹으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할머니들은 그랬다. 내가 기억하는 옛날 세탁기는 세탁 칸과 탈수 칸이 양쪽으로 나뉜 모양이었는데 집에 세탁기가 있어도 할머니는 물값, 전기값을 아낀다고 큰 대야를 놓고 매일 손빨래를 하셨다. 마루에서 부엌에서 뒤란에서 장독대와 마당에서 하루종일 꿈지럭거리며 일은 하던 할머니의 손은 이태리타월을 낀 것처럼 거칠었다.
가려운 등은 할머니가 손바닥으로 쓱쓱 문지르기만 해도 시원해졌으니까.
'물가가 오르고 경제가 어렵다 보니 세대를 아울러 절약하는 생활이 번지고 있다'는 뉴스를 보고 옛이야기를 떠올렸다.
내가 경제 상황을 인식할 무렵부터 어렵다던 우리 경제는 수십 년 후인 지금도 여전히 어렵다. 오히려 경제가 어렵지 않다고 하면 그게 더 이상할 정도다. 경제는 쉬울 때가 없는 존재인가 보다.
정부는 내수 경제를 살리려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하지만 돈을 쓸 사람들은 기왕이면 해외에서 쓰고 투자도 외국에 하려고 한다. 아끼려는 사람들은 각종 유혹에 흔들림 없이 아낄 수 있는 것을 아끼려 한다. 일상에서 쓸 돈을 아끼는 판국에 투자할 돈은 더욱 없다.
많이 벌어야만 돈을 모으는 것이 아니다. 많이 벌어도 버는 대로 쓰면 모자라다. 남들보다 적게 번다 해도 아껴 쓰면 남는다.
세상에는 화려하게 소비하고 누리는 사람들의 이야기 못지않게, 한 푼 두 푼 아끼고 티끌을 모아 태산은 아니지만 작은 언덕이라도 만들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다. 특히 시청자의 헤픈 소비 습관을 교정해 주는 예능 프로그램은 집에서 설거지를 하며 술렁술렁 보기에 딱 좋다.
여기저기 잡동사니를 모아놓은 집을 보면 우리 집을 더 청소하고 싶어지는 것처럼 남들이 쓴 영수증에 패널들이 가타부타 참견하는 장면을 보면서 슬쩍 나의 영수증을 돌아보게 된다.
며칠 전에 백화점 건물에 영화를 보러 갔다가 커피를 샀다. 영화관이 있는 층에 커피를 파는 곳이 있었고 위층에도 카페가 있었는데 거기는 공간이 꽤 넓어서 친구들과 만날 때 가끔 가서 스탬프를 모으는 곳이었다. 나는 위층 카페에 가서 커피를 사고 도장 하나를 받았다. 나름 알뜰하게 챙겼다고 뿌듯했는데 내려와서 보니 영화관 옆에서는 반값에 커피를 살 수 있었다. 위층 카페는 거기서 먹든 가져가든 커피값이 같았고 아래층은 테이크아웃 커피를 반값에 주는 것이었다.
참 우습게도, 더 큰돈은 쉽게 쓰면서 그날의 커피 차액 2500원에 속이 오래 쓰렸다. 잘 기억했다가 다음에 영화 보러 왔을 때는 꼭 저기서 커피를 사야지 했다.
절약은 '결핍'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궁상'과 유사어도 아니다. 극장 안에서 영화를 보며 커피를 마시고 싶은데 몇 천 원에 참으면 궁상일 수 있지만 반값 커피를 골라서 사면 절약이다.
물가가 너무 올랐으니 외식 횟수를 줄이고 장을 봐서 만들어 먹으려 노력하는 것은 절약이지만 요리하기 싫고 몸이 힘든 날에도 돈을 안 쓰려는 것은 궁상맞다.
절약과 구분해야 하는 개념으로 '인색'도 있다. 오로지 돈을 아끼기 위해 특별한 날의 외식을 원하는 가족을 외면하는 것은 가혹한 인색이다. 할머니 본인이 전기요금이 아까워 세탁기를 안 쓰는 것은 절약이지만 며느리에게도 세탁기를 못 쓰게 하는 것은 인색이다.
절약은 나와 남에게 손해를 입히지 않지만 궁상은 나 자신을 비참하게 하고, 인색은 타인에게 폐를 끼친다. 이 경계의 밸런스 유지가 은근히 어렵다.
'아끼라'라고 당부하는 말은 당연히 쓸 곳에도 쓰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낭비와 남용을 조심하라는 말이다.
자본주의는 태생적으로 수요보다 공급이 넘쳐나고 생산과 소비가 곧 발전과 연결된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절약을 말하는 것이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절약의 가치가 개인적인 이익을 떠나 우리 사회의 상생, 지구의 환경과 인류의 미래에 대한 문제로까지 이어진다. 한 사람이 음료 한 잔의 소비에 쓰고 버리는 빨대와 컵 쓰레기가 모이면 엄청난 공해가 되는 것이 그 예다.
절약은 풍요로운 현대 물질문명에서 오히려 필수 덕목이 되었다.
좀 더 버는 대신 좀 더 아끼는 편이 건강과 행복의 측면에서도 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