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하는 말이 있다. 직장에서는 맘대로 퇴직할 수 있지만 인생에서는 퇴직할 수가 없다고.
비슷한 맥락으로 말하자면, 퇴직을 하면 매달의 수입은 곧바로 '사라'지지 만 매달의 지출은 여전히 '살아'있다. 그래서 우리 같은 50대의 자발적 명퇴자도, 만기를 채워 은퇴한 정년퇴직자도 결국은 얼마라도 벌려고 사방으로 분주한 것이 아닐까.
희한하게도 내가 만나는 택시 기사님들마다 하는 얘기가 비슷하다. 본인은 대기업을 얼마 전에 퇴직했고 평생 먹고 살 건 다 마련해 뒀다, 자녀들도 각자 취업해 알아서들 살아서 걱정거리가 없지만 아직 젊은데 놀면 뭐 하나 싶어 개인택시를 하신다는 것이다. 게다가 개인택시를 하며 투입한 1억 이상의 면허값은 올라갈 수밖에 없는 법이라 벌써 이익을 내고 있다.
백미러로 보면 슬슬 퇴직이 이슈가 될 또래임을 알겠어서 그런지, 퇴직 후 일거리로는 남자든 여자든 개인택시만 한 게 없다고 강조한다. 세간에서 더 이상 택시가 돈이 안 된다고들 하지만 그렇지 않단다. 무엇보다 내가 하고 싶을 때만 하루 몇 시간 일한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한다.
백세 시대에, 아직 팔팔한데, 집에서 빈둥거리는 게 싫어서 다시 일한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공감이 갈 듯하면서도 결국 안 간다.
나는 노는 게 제일 좋던데?
언제든 예고 없이 터질 수 있는 특별 지출도 걱정거리지만 줄일 수 없는 고정 지출이 가장 큰 문제다. 퇴직 후에는 그동안 회사가 반을 내주던 국민연금을 오롯이 혼자 부담한다. 국민연금은 만 60세까지 낸다는 기한이 있지만 건강보험은 재산과 연금 포함 소득이 있다면 평생 내야 한다. 퇴직 후에는 국민연금과 국민건강보험을 재산정한다. 여력이 된다면 국민연금 월 상한 보험료(2025년 7월 기준 약 57만 원)까지를 낼 수도 있고 상황에 따라 임의가입제도를 활용해 마지막까지 납입할 수 있다.
부의 재분배 및 노후의 최저 복지 보장이 목표인 국민연금은 더 많이 들고 싶어도 못한다. 이와 달리 병원에 가든 안 가든 내야 하는 건강보험은 각종 소득 금액에 재산 금액을 더한 기준으로 부과되어 상한액이 훨씬 높다. (현재는 자동차가 과세 부과 대상이 아님)
그래서 퇴직 후에 다시 4대 보험이 되는 일자리를 찾아 취업하거나 가능하다면 직장에 다니는 배우자나 자녀의 피부양자가 되는 게 가장 이익이다.
퇴직자 이름으로 건강보험료를 안 내려면 촘촘한 기준에 맞아야 한다. 각종 소득과 재산세 과세 표준액이 기준 이하가 되면 피부양자로 등록할 수 있다. 즉, 수입이 없고 재산이 적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현재 소득이 없다. 하나 있는 집도 과세 표준의 가로막대에 넉넉하게 들어간다. 우리 집이 비싸지 않은 덕을 이렇게 볼 줄이야.
나중에 별도의 수입이 생기든지 연금을 받기 전까지는 일단 딸에게 들어가야겠다.
퇴직 처리가 되고 딱 보름 만에 건강보험공단에서 지역가입자로 자격이 변동된다는 알림이 왔다. 굳이 어느 한 녀석을 콕 집어 부탁하기도 그래서 선착순으로 지원자를 구하기로 했다.
남편이 가족 톡방에 '건강보험에 올려줄 딸'을 구하는 공고를 냈다. '본인을 피부양자로 올려도 부양자가 더 부담하는 금액이 없음'을 슬쩍 호소하는 게 웃겼다.
작은딸의 회사에 필요 서류를 제출한 다음 주에 의료보험 피부양자 등록이 완료됐다. 만약 지역가입자로 남으면 얼마를 내야 하는지 국민건강보험 공단 홈페이지의 모의계산기로 확인해 보니 월 10만 원쯤 된다. 10만 원은 퇴직 부부에게 근사한 저녁 데이트 한 번의 기회비용이 된다.
하물며 매달 10만 원을 아낄 수 있다면!
이러니 딸의 피부양자가 되는 머쓱함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