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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의 효자손

by 이명선

'효자손'이란 보통 대나무로 만든 긴 막대형 셀프 등긁개를 말한다.

주로 중년 이상의 소비자가 혼자 할 수 없는 동작을 묵묵히 대신한다는 쓰임새를 감안하면 효자손이란 네이밍은 찹쌀떡이다. '스카치테이프'나 '퐁퐁' 같이 특정 브랜드가 그 물건의 이름으로 통용된 경우가 아닌가 한다.


안면홍조와 조울증스런 감정 변화에 비해 거의 알려지지 않은 갱년기 증상 중 하나는 피부 가려움이다.

이유는 복합적인데 흔히 노화로 인해 콜라겐 생성이 줄면서 피부가 건조해지고 장벽이 손상되며 외부 자극에 더욱 민감해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내가 볼 때 외부 자극이 맞는 것이, 특히 위아래 속옷 선과 단발 머리카락이 닿는 목덜미 부분이 간지럽거나 따가워 죽겠다. 가끔은, 20여 년 전 제왕절개를 두 번 하고 아랫배에 남긴 한 줄의 스티치 자국도 미치게 간지러울 때가 있다.


굳이 줄어든 유연성을 탓하지 않더라도 인간 팔의 정상적인 가동 범위 밖에 존재하는 등 쪽 특정 구역이 간지러우면 타인의 도움을 받아 긁어야만 시원하다. 남편에게 말하면 '이거, 한 군데 긁기 시작하면 전체적으로 가려워지는데'라고 말하며 긁어 주는데 진짜로 긁기 전에 아무렇지 않던 부위까지 간지러움의 파장이 퍼진다.


남편이 맨날 옆에 있는 것도 아니고 옆에 있다 해도 가려울 때마다 등을 까보이기가 그래서, 쿠팡에서 '5단 접이식 스테인리스 휴대용 효자손'을 720원에 샀다. 쑤시거나 찌르는 아픔에 못지않은 가려움의 통증을 충분히 안다는 듯이 주문한 다음날 새벽배송으로 효자손이 왔다.

대단하다. 720원이면 편의점에서 껌 하나는 살 수 있을까?


720원에 무려 5단계로 늘어나는 효자손을 새벽에 받는다니, 이 사실은 널리 알려야 한다.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든 밤, 문득 등이 가려워서 깼다. 견갑골 아래에서 등 가운데보다 약간 위쪽인 듯한데 양손이 닿지 않는다. 누운 채 등을 비벼봤지만 시원찮다. 정작 간지러운 스폿을 못 건드리고 변죽을 울려대니 점점 더 가려워진다.

내가 풀썩거리는 서슬에 남편이 깼다.

우리 침대가 아무리 '옆에서 자는 사람이 뒤척여도 흔들리지 않는 포켓스프링'이라 해도 잘 자던 사람을 깨우는 것은 매트리스의 진동만이 아니다. 옆사람의 수상쩍은 인기척과 공기의 파동으로도 룸메이트의 잠은 깨진다.

남편은 잠에 푹 잠긴 발음으로 등이 간지럽냐고 물었다. 효자손이 있으니 내가 알아서 하겠다며 어둠 속에서 주섬주섬 효자손을 찾아 집었다.

다시 고요해진 남편의 숨소리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배 위에서 두 손만 살금살금 움직여 효자손을 늘렸다. 왼손으로 조용히 옮겨 쥐고 천천히 등 쪽으로 밀어 넣었다.

남편의 숨소리가 흡! 하고 멈출 때마다 내 손도 뚝 멈췄다. 평생 같이 사는 남편도 깰까 봐 저절로 슬로모션이 되는데 한밤중에 남의 집에 들어가서 도둑질은 어떻게 하는 건지.


여러 번의 집요한 움직임 끝에 딱 가려운 부분을 긁는 데 성공했다. 우리 나이엔 자칫 팔을 잘못 놀렸다간 근육통이 올 수 있어서 조심해야 한다. 팔을 꺾을 수 있는 한도까지 다 꺾으면 안 되고 6,70 퍼센트까지만 돌려야 안전하다.

누운 상태에서 등을 긁으려니 상체의 무게가 더해져 더욱 고난도의 미션이었다.


가려운 곳을 긁으니 역시나 여태 아무렇지 않던 어깨, 등, 옆구리까지 간지럽기 시작했다. 효자손을 돌려가며 살살 긁는 재미에 빠져 보니 손이 닿는 부분까지 굳이 효자손으로 긁고 있었다.

낮이든 밤이든 내가 필요로 할 때 군소리 없이 일하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지 않아도 되니 '효자손'이 맞다.


가만있어봐, 혼자 사는 딸들이나 우리 엄마는 등이 간지러울 때 어떻게 하지? 나도 애들 나이엔 등이 간지러워 불편한 기억이 없으니 할머니인 엄마야 말로 효자손이 필요할 것 같다.


챗지피티에 의하면 갱년기 피부 가려움증에는 일단 보습이 가장 중요한데 한 겹으로는 부족하고 최소 2단계의 레이어링을 하란다.

미지근한 물로 샤워 후 순한 성분의 바디로션이나 크림을 베이스로 바르고 속옷 라인과 겨드랑이 같이 접촉성 가려움증의 여지가 있는 부위는 오일이나 바셀린으로 두 겹 보습을 추천한다.

그리고 원한다면 내가 쓰는 제품의 성분을 분석하거나 추천 상품의 링크도 주겠다고 했다.

손톱으로 긁으면 상황이 악화될 수 있으니 너무 가려울 땐 차가운 수건을 대는 방법이 있다고 조언하더니 마지막으로 수일 내 가려움증이 완화되지 않으면 피부과에 방문하라며 적당한 선에서 책임을 분배하며 분쟁을 피했다.


그 밖의 다른 갱년기 증상으로 힘들지는 않냐는 챗지피티의 상냥한 걱정을 무시하고 휴대폰을 닫았다.

그 밖의 다른 갱년기 증상이 아직 없다는 것이 다행이지만 설령 다른 것이 더 찾아온다 해도 그때마다 적절히 대응하면 된다.

앉아 있다가 일어나면 저절로 나오는 에구구 소리나 어느 날부터 목에 잡히는 세로 주름, 와이파이 무늬 같이 수 겹이 된 무릎살도 이제는 익숙해지지 않았나.





보습을 위해 등에 꼼꼼히 크림을 바르려니 혼자서 할 수가 없다.

또 도움이나 도구가 필요했다. 혼자서 하려고 찾아보니 셀프로 등에 크림을 바를 수 있는 제품도 있었다. 역시 현대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있는 시대다.

최종 결제를 위해 손가락을 좌에서 우로 밀기 직전에 어떤 사람의 후기를 봤다.


- 하, 보습크림은 역시 손으로 발라야 하네요. 사람의 체온으로 문질러야 피부에 스며듭니다. 이걸로는 크림이 겉돌아요. 바르고 나서 옷을 입으면 등에 척 붙습니다......


하긴 원숭이들도 일부러 서로 털을 골라주고 이를 잡아주며 친밀감을 쌓는다는데 등을 긁어달라지 않는 대신 가려운 등판에 보습크림은 그냥 발라달라고 해야겠다.


등에 크림 바르는 도구 상세 페이지에서-다시 보니 남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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