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명퇴자의 쓸모 1

딸의 직무적 조력자

by 이명선

인사팀 2년 차인 작은딸은 회사의 2026 신입사원 공채 건으로 한창 바쁘다.

신입 채용을 할 때도 처음부터 해당 직무에 한정해서 필요한 만큼만 뽑아 곧바로 일을 시키고 성과를 기대하는 기업들이 늘었다. 취업준비생들은 일찌감치 관심 영역을 정해 능력과 자격을 준비하고 그와 관련한 인턴쉽 두어 개까지 성공적으로 끝내야 좋은 직장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진다.

팀의 막내로 제 역할을 해내는 작은딸도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학교에서 학년별 맞춤진로상담을 시작했고 학과 성적 관리 외에도 무슨 학회에 가입한다, 어디 공모전에 나간다, 취업 선배들의 조언을 듣는다 하며 바빴다.

선배들 라인이 잘 형성되고 내실 있는 학회는 들어가는 것부터 어렵다고 해서 놀랐다.

딸이 처음 인사 직무로 진로를 정했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인사팀은 자리가 잘 나지 않는다'는 우려였다. 큰 회사에서도 다른 직무에 비해 인사 담당 신입은 적게 뽑거나 아예 채용 계획에서 빠지는 곳도 흔했다.

역시 HR로 일했던 남편은 딸에게 회사의 규모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곳인지를 먼저 보라면서 대기업도 좋지만 작더라도 성장할 수 있는 회사도 의미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졸업과 동시에 꼭 취업을 해야 한다는 조바심을 갖지 말라고 했다.

딸은 아빠가 세태를 모른다며 툴툴거렸다. 졸업 후 취준 기간이 길어지면 그 자체로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게 되고 아무리 이직이 흔하다지만 첫 직장은 커리어에서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말은 모두 맞다. 그리고 세상이 많이 바뀌는 것처럼 보여도 사람들이 함께 일을 하는 조직 문화의 내면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다.

작은딸이 한참 기업 경영에 관련한 트렌드를 공부하면서 아빠와 나누는 얘기를 들으면 나는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뿌듯했다. 같은 길을 가는 부녀가 좀 더 이야기를 나누라고 과일이나 음료를 내놓았다.

아이가 목표로 하던 기업의 입사 전형 단계를 하나씩 패스해 갈 때 아빠의 진가가 가장 빛났다.

실제 현직자와 멘토멘티로 짝을 이뤄 주어진 과제를 연구해서 발표까지 마치는 미션이 채용 과정의 막바지에 있었는데 그 멘토는 그 미션의 1차 평가자였다.

남편은 딸의 보고서를 신중히 살피고 자기 팀원에게 하듯 피드백을 주었다. 그리고 마치 오디션 프로그램 같이 합격자를 줄여가는 면접 단계에서 유의할 점도 기성 면접관의 시선으로 일러줄 수 있었다.

남편에 의하면 최종 면접에서는 그날 누가 면접관이었는지에 따라 당락이 죄우될 수도 있다고 한다. 최종 면접에서 떨어지면 지원자는 가장 크게 좌절하게 되지만 거기까지 갔다면 지원자의 준비 부족이 아닐 수 있으니 흔들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결국 딸은 원하던 기업에 들어갔다. 대학 시절 내내 찬찬히 준비한 딸의 노력에 같은 직무에서 쌓아 온 아빠의 팁이 더해져 좋은 결과를 낸 것이다.

친한 언니네 남편은 해외 마케팅 부문에서 여전히 실무에 계시는데 그 집도 두 딸 중 하나가 업종은 다르지만 해외 마케팅 일을 한다. 가끔 남편이 딸에게 30여 년의 노하우를 전할 때면 언니도 나처럼 뿌듯하다고 한다.


아이들이 어릴 때, 아빠는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해할 때가 있었다. 학교와 집 그리고 보이는 동네가 전부인 아이들에게 어른들의 회사는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일 거다.

나는 '아빠는 회사에 필요한 사람들을 뽑아서 교육하는 일을 한다'고 말해 주었고 애들은 제 나름대로 받아들여 이해했을 것이다.

왜 하필 HR을 지원하느냐는 빠지지 않는 면접 질문에 딸은 그럴듯한 대답을 고민할 필요 없이 아빠 이야기를 솔직하게 풀어냈단다.

저번에는 딸이, 회사 행사 때문에 만난 업체 분이 아빠를 알더라며 놀랐다. 넓은 세상에 나갈수록 세상이 좁다는 것을 느낄 테니 이것도 아이러니다.


남편은 아이들에게 운동화끈 매는 방법과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 주고 배드민턴 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커서는 운전면허 시험장의 코스를 함께 돌며 운전도 가르쳤다.

앞으로 애들에게 무언가를 더 가르칠 일은 없겠지만 어른의 세계에서 왕성하게 살아갈 딸들이 무언가 갈피를 잡고 싶은 일이 생길 때, 남편은 여전히 조력자가 될 것이다.

설령 인공지능의 해답과 크로스체크를 한대도 우리가 아직은 쓸모 있는 답을 내놓을 수 있다고 믿는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