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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퇴자의 쓸모 2

아내의 간병인

by 이명선

한 달 반 사이에 예상치 못한 수술을 두 번 했다. 다행히 위중한 케이스는 아니었지만 나름 전신마취와 척추마취를 하고 도합 3박 4일간 입원을 했다. 갱년기에 받는 수술은 회복 속도도 더디고 기본 체력이 쉽게 떨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거울 속의 내가 한층 늙어버렸다.

나의 입원과 수술은 마지막 제왕절개 출산 후인 25년 만이다. 그동안 큰 일 없이 운 좋게 잘 살았단 뜻이자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 건지 미처 모르고 살았다는 의미도 된다.


병원과 집 어디에서든 나의 보호자이자 간병인은 남편이었다. 남편이 아직 직장에 다니고 있었더라면 나의 갑작스러운 투병생활은 꽤나 불편하고 외로웠을 것이다.

집에 있는 남편이 이런 쓸모가 있네, 하고 저녁밥을 차리는 남편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남편이 있으니 밥을 차려주거나 내 몸을 챙겨주는 것 외에 입퇴원과 외래 때 병원에 다니기가 편해서 좋았다. 나는 운전을 할 상태가 아니었으니 매번 택시를 이용했을 테고 그에 따른 크고 작은 불편들이 생겼을 터이다.


- 내가 퇴직하기를 기다려서 수술한 거야?


라는 남편의 농담이 농담이 아니게 들렸다. 남편이 없었다면 내 몸이 아프다고 해서 다른 데에 살며 직장에 다니는 딸들을 부르기도 미안하고, 늙은 엄마를 호출하기도 싫어서 나 혼자 다 했을 것이다. 그러느라 나도 모르게 한탄과 짜증이 튀어나오겠지.

남편이 회사를 다니며 필요한 때마다 휴가를 내는 것과 아예 집에서 나를 위해 24시간 대기를 하는 것은 다르다. 개인 비서가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두 번째 수술을 하고 보름이 조금 지났을 때 추석 연휴가 있어서 이번 명절에는 집에서 쉬었다. 결혼을 하지 않은 고등 친구에게, 처음으로 추석을 혼자 보내니 너무 좋다고 했더니 '그 재미를 한번 알면 잊기 힘들 텐데'하는 답이 왔다.

시어머니는 추석에 못 온 며느리 먹으라고 전이며 송편, 과일들에다 갈비찜까지 싸 주셨다. 나 없는 명절 아침을 걱정했다 그랬더니 딸들이 '엄마가 없이도 잘만 굴러갔다'라고 했다. 이건 마치 내가 없으면 회사가 망할까 봐 걱정하는 직장인이었네.


나는 수술실에서 카운트다운 중이었는데 눈을 뜨면 모든 것이 끝나고 병실에 옮겨져 있다. 환자 당사자가 제일 힘들겠지만 환자로서는 가장 막중한 순간은 의식 없는 사이에 휙 지나간다. 그러나 수술실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일 분 일 초의 무게를 그대로 감당해야 한다. 시간이란 매우 상대적이어서 스쿼트를 버티는 30초,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5분이 얼마나 긴 지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사랑하는 사람이 수술실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는 몇 시간은 말할 수 없이 초조할 것이다.

나는 수술실 밖에서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려 본 적이 없다.

문득 고마워서, 다음에 당신이 아플 땐 내가 간병해 줄게라고 했더니 자기는 그럴 예정이 없단다. 입원과 수술이 뭐 예정하고 하는 거냐. 서로를 간병해 줄 수 있을 때는 괜찮지만 더 늙고 힘겨울 때는 어떻게 하나 싶어서 병실 침대에 누운 채 간병비 보험을 찾아보았다.




우리 노후에 가장 중요한 것이 '돈'이 아니냐는 주장에 노인 문제 전문가 이호선 교수는 '그건 몸이 들 아파서 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내 몸이 아프면 돈이 아무리 많아도 쓸모가 없다. 심신이 불안하지 않게 살 만큼의 돈으로 충분하다. 생존을 고민할 만큼 궁핍하면 당연히 안 되지만 건강한 몸만 있다면 조금 부족한 돈은 어찌어찌 벌기도 한다. 극단적으로 말해, 일단 몸이 건강해야 <오징어 게임>에라도 참가해 뛸 수 있는 것이다.


곁에서 수발을 들며 나를 지켜본 남편도 새삼 건강의 중요성을 상기한 눈치다. 해외여행을 할 여유가 없으면 가까운 곳에 당일로만 다녀와도 되지만 즐겁게 걸을 기운과 기분이 없으면 통장 잔고는 헛것이다.

두 달 가까운 기간에 아까운 가을이 지나가는 바깥으로 나갈 수 없고 집안에서도 그저 누워있어야 했던 나는 절실하게 내 몸의 소중함을 느꼈다.

세상에서 진정한 '내 것'이라고는 비루한 이 몸뚱이 하나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 몸조차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 더 서러웠다. 벌써부터 이러면 어쩌란 말이냐. 나는 도저히 우리 엄마나 어머니같이 활력 넘치는 80대가 못 될 것 같다.

늙을수록 부부만 남는다고 하지만 모든 부부가 그런 건 아니다. 최소한 서로 짧은 수술 전후의 간병을 덤덤히 나눌 만큼 '적당히 가까운' 부부가 남는다.

건강, 가족, 부부 그리고 그다음이 돈이라고 가치 순서를 바꾼 것을 보니 나도 좀 아팠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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