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우리 개를 만지는 데 2년, 들어 올리는 데에 다시 1년이 걸렸어. 그런데 지금은 내 껌딱지야. 조금만 더 기다려 줘.
군밤이가 집에 온 지 이제 한 달이 지났다. 친구네 개와 같다면 내가 군밤이를 만질 수 있을 때까지 앞으로 23개월은 더 있어야 한다는 소리다.
한숨이 나는 차에 휴대폰 알람이 온다. 네이버페이의 사이버 펫이다. 하루에 몇 번 쓰다듬어 달라 알람을 보내고 터치하면 꼬리를 치고 방울을 흔들며 혀를 내미는 게 아주 귀엽다. 사료 대신 포인트를 먹어야 크는 게 대기업의 농간이지만!
나랑 같이 사는 애보다 니가 더 나를 좋아하는구나.
나는 껌딱지 개를 원하지 않는다. 그저 한 달째 차고 있는 저 답답한 목밴드를 풀어주고 싶고, 따스한 봄에 사이좋게 산책을 다니고 싶을 뿐이다.
어딜 가든 나를 졸졸 따라다니고 내가 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개는 원하지 않는다.
가족이 들어올 때 현관 앞까지 안 나오더라도 자기 방석에 누워 꼬리만 좀 흔들어주면 되는데 말이다.
어영부영 한 달이 지났지만 군밤이는 여전히 나를 믿지 못한다.
저 아줌마가 이번엔 또 무슨 수작이야, 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내가 뭘 하려 하면 더는 숨을 수도 없는 텐트 안으로 몸을 밀착한다.
그걸 보고 있자니 속상하고 작년 가을에 우리를 떠난 까미가 보고 싶다. 까미와 살 때는 이렇게 신경 쓰고 노력하지도 않았는데.....
우리 가족의 반려견으로 잘 살아줘서 새삼스레 너무 고맙고 미안하다.
강아지부터 키웠던 반려견과 성견이 된 후 데려온 반려견은 너무나도 달라서 완전히 초보 집사의 처지가 됐다.
군밤이가 있던 센터에서는 궁금한 것은 언제든 물어보라고 말씀하지만 실상은 그럴 수가 없다.
개 한 마리 데려와 놓고 징징거리는 것 같고 센터 입장에서는 혹시라도 '이러다 파양 하는 것 아닐까'라며 걱정할지도 모른다.
유튜브를 주로 보다가 최근에 네이버 카페에 가입했다. 다 자란 유기견을 만나 성공적인 가족이 된 일반적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 외에도 네이버 엑스퍼트, 인스타의 개인구조자 계정 등을 통해 틈틈이 도움을 받고 있다.
책도 두 권 빌려 보았다. 이론에 강한 미국의 동물행동학 박사와 실전으로 무장한 우리나라의 반려견지도사의 책들이다.
'의연한 태도로 대하고 모른 척 놔두면 스스로 다가온다'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은데 내가 시간이 너무 많고 한가해서 더 애가 타는 것인가 보다.
지인들의 요즘 인사는 '군밤이와는 좀 친해졌냐'이다. 나는 '개는 저 혼자서 아주 잘 지낸다'라고 대답한다. 저는 저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 지내는 현실이다.
군밤은 텐트를 치고 방석을 놓아 꾸며준 집 안에 머무르며 거실을 바라본다. 하우스는 소극적인 개체의 안정을 돕지만 가족들과의 거리를 좁히는 데는 방해가 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었다. 딜레마다.
한 달이 지났으니 방석은 그대로 두고 텐트만 걷었다. 텐트를 치울 때 당황해서 거실로 나왔던 군밤은 다시 방석으로 돌아가 그 전과 똑같이 생활했다.
머리 위에 텐트가 있고 없고만 다를 뿐 맨날 같은 그림이었다.
개와 친해지려면 직접 손으로 사료를 주라는 말을 듣고 한두 번은 시도해 봤다. 애걸하며 손을 받치고 있어도 고개를 돌리고 눈을 피해 팔도 아프고 삐쳐서 포기했었다.
다시 딱 2주를 잡고 '손으로 사료를 주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낮에 심심해 보여 이유 없이 주던 간식을 최소화하고 하루 한 끼 저녁에 먹는 사료는 습식 토핑까지 섞어 맛있게 조제해서 손으로 직접 주는 거다.
첫날 저녁은 당연히 안 먹었다. 오늘은 굶겠는데 어쩌지 싶었지만 냉정하게 손을 뺐다.
다음날, 개는 여전히 사람 손이 두렵지만 배가 고팠는지 참으로 힘들게 입을 대더니 다행히 여러 번에 걸쳐 손바닥에 덜어놓은 사료를 다 먹어 주었다.
손바닥으로 밥 주기를 한 번 성공한 다음날이 어제였다.
낮에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개가 어쩌고 있나 캠 화면을 보는데 웅크리고 자다가 도어록 소리를 들으면 고개를 들곤 했었다.
어제도 역시 캠 화면을 보며 도어록을 눌렀는데 웬일로 군밤이가 중문 앞으로 뛰어나와 현관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 모습에 깜짝 놀라고 기분이 좋아서 이름을 부르며 들어가니 후다닥 방석으로 도망갔다.
그래도 나를 아주 무서워하는 건 아닌가 보다 싶어 마음이 놓였다.
손으로 밥 주기 셋째 날인 어제저녁은 전날보다 좀 더 적극적으로 먹었다. 얼떨결에 중문 앞으로 마중도 나갔겠다, 자존심 살짝 내리고 아줌마가 주는 대로 먹자고 생각한 것일까.
개의 따뜻한 혀와 까실한 수염의 촉감이 손바닥에 느껴졌다. 살짝 손을 오므려 폭신한 턱살에 닿아 봤는데 저항 없이 먹었다.
우리 조금씩(너무 조금씩이지만) 친해지자. 이렇게 1센티씩 다가가다 보면 5월쯤에는 함께 산책도 할 수 있겠지!
개가 있는 쪽에서 자꾸 버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서 나가보니 간식을 보관하는 종이 상자의 뚜껑을 열고 제가 좋아하는 닭고기 육포를 봉지채 꺼내갔다.
거실 바닥이 미끄러울까 봐 넓게 깔아 놓은 애견 매트 덕에 발톱 소리를 안 내고 다니며 자잘하니 사고를 친다.
육포 반 봉지를 다 뜯어먹고는 죄지은 표정을 하고 있길래 말없이 정리를 하고 큰 육포 하나를 새로 줬다.
그래, 아무래도 귀엽기만 한 사이버 펫보다는 말썽쟁이 현실 펫이 재미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