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333년의 태백산 언저리를 상상한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태백산은 지금 네이버 지도에 나오는 강원도 태백산국립공원이 아니다. 다양한 추정 중에 백두산과 묘향산 정도로 보는 학설이 주류다.
그래도 건국신화의 배경인데 쉽게 가 볼 수 없는 민족의 명산 백두산쯤으로 보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찾아보니 백두산 주변에는 마침 쑥도 산마늘도 산달래도 자생한다. 아득한 옛날에는 백두산 호랑이와 반달가슴 곰도 살았을 거고 그 무리 중 한 마리씩은 사람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육식성인 호랑이와 잡식성인 곰에게 사람이 되고 싶다면 오로지 채식만 먹으며 동굴에서 백일을 버티라는 환웅의 지시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어쩌면 처음부터 환웅 할아버지는 귀여운 곰에게 끌렸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백일 기한을 다 채운 것도 아니고 호랑이가 포기하자마자 달랑 21일이 지난 날 곰을 여자사람으로 만들어 줬던 것이다....
'내가 너에게 사람이 되길 바란 것도 아니고 그냥 집개가 되길 바랐을 뿐'이라고 혼잣말을 하며 여전히 잠을 자고 있는 군밤이를 바라본다. 집에 온 지 백일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웬만하면 자기 방석 위에서 버티고 누워 나오지 않는다. 내가 다가가면 할 수 없이 방석을 뜨는데 '이이잉'하는 소리를 내며 안절부절못하고 왔다갔다왔다갔다왔다갔다만 반복한다.
물론 개는 원래 낮시간에는 주로 잔다. 그래도 그렇지, 옆구리에 욕창 생기겠다, 그 꼬리는 방석에 찜 쪄 먹을 거냐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그 사이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집에 온 지 한 달쯤 지났을 때 내가 주방에 있으면 어물쩍 다가오기도 했고 남편이 베란다에서 화분을 보고 있으면 뒤통수를 경계하며 나가보기도 했었다. 물론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후다닥 도망을 가 버렸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기다림 정책으로 가자니 너무 진도가 느렸고, 어차피 가족이 된 개를 이대로 두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는 외부적인 힘으로 이끌 필요도 있다고 판단했다.
군밤이를 돌봐주셨던 센터 훈련사님의 방문 지도 아래 강제로 목줄을 하고 집안 산책과 집 앞 산책을 했다. 막상 산책을 할 땐 또 앞서 나가며 잘했다. 갑자기 켜진 그린라이트 때문에 가슴이 벅찼었다.
그 후에 목줄 연습을 한다며 켄넬 안에 잘 있는 군밤이에게(켄넬 밖에 있을 때는 목줄을 채울 도리가 전혀 없으므로) 강제로 딱 세 번 목줄을 했는데 이제는 나를 보러 주방까지 절대 오지 않고 잘 들어가던 켄넬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군밤이에게 켄넬은 '저기 들어가면 목줄을 맨다'는 공식이 입력돼 버린 모양이다.
군밤이의 행복 켄넬 350은 몇 주 째 공실 상태다.
우리나라는 100일의 의미를 중시한다.
아기가 태어난 후 백일째 날은 그 인생의 첫 기념일이고, 사랑을 시작한 연인은 로맨틱하게 백일을 기념한다. 인간이 맞닥뜨리는 갖은 중차대한 디데이를 100일 앞둔 하루는 신앙의 영역이 된다. 수능까지 백일 디스카운트 시작되는 날에 당사자들은 시험을 핑계로 백일주를 마시고 어머니들은 100일 기도에 들어간다.
심지어 대한민국의 시발점인 고조선 건국신화에서도 곰이 '쑥과 마늘'(이견이 많으나 일반적인 표현을 쓰겠다)만 먹고 동굴에서 버틴 지 100일 만에 어여쁜 여자사람이 되는 매직이 일어나지 않았나.
100은 10의 제곱이다. 열흘씩 열 번이 지나간 것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가벼운 시간은 아니다. 하루는 길지만 일주일은 짧게 느껴지는 것처럼 한 달은 길었는데 백일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심리학이나 관습상의 근거 외에 100일의 의미를 과학적으로도 댈 수 있다.
습관 형성을 연구한 사례에 의하면 경험과 개성, 능력치가 다른 각 사람이 새로운 습관을 익히는 데에 평균 66일, 최대 254일이 걸린다고 한다. 100일은 평균을 넘는 충분한 기간이므로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100일쯤 됐을 때 마음먹은 한 가지를 성취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전 세계에는 각종 100일 프로젝트가 친근한 해시태그로 끊임없이 유행하는 것이다.
그런 중차대한 약속이자 희망의 백일이 지나버렸다. 나는 다음 언제를 기약할 수 있을까.
군밤이 가 집에 온 첫날이 기억난다. 처음에는 군밤이가 이동장 안에서 자연스럽게 나오게 하자며 문을 열어 둔 활동가님도 개가 전혀 나올 생각을 않고 켄넬 구석에 몰려 덜덜덜 떨고만 있자 애를 좀 꺼내줘야겠다며 이동장을 기울였었다.
군밤이는 집을 좀 돌아다니나 싶더니 식탁 아래로 숨어 버렸다.
원래 입양날 가족사진을 찍어 주신다는데 우리는 개가 다가오지 않아서 찍지 못했다. 사진 따위야 나중에 찍으면 된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면 괜찮겠지, 두 달이 지나면 낫겠지, 석 달이 지나면 그래도 꼬리를 치고 다가와 주겠지 하다가 100일이 지났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연극치료의 선과 악 캐릭터처럼 혼돈이 일어난다.
- 니가 우리를 고른 게 아니고 우리가 널 데려온 거니까... 흑흑
- 아니, 그래도 그렇지. 맨날 맛있는 것만 챙겨 먹고 먹튀 하기 있냐?
- 어차피 십 년 이상 같이 살 텐데 1년이 걸려도 되지.
- 쟤 눈치 빠르고 민감하다며 이렇게 자기한테 잘해주는 마음을 몰라주냐?
작년에 떠난 첫 번째 반려견 까미와 즐겨 걷던 길을 지나며 남편이 말했다.
- 군밤이가 저러고 있으니까 우리 까미가 더 보고 싶네.
그때 딱 내 마음도 그랬다.
그나마 사람에게 애착이 심해 꼼짝 못 하게 하는 경우보단 훨씬 낫다는 위로를 해야지.
밤에는 자는 개를 펫캠으로 훔쳐보고 낮에는 자는 개 사진만 찍으며 무덥고 길 거라는 올여름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