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주점에 갔다. 해물김치전을 기다리며 먼저 나온 미역국과 도토리묵을 먹는데, 낙서가 가득한 벽을 구경하던 남편이 말했다.
- 저기 'ㅇㅇ과 ㅁㅁ 사랑 영원히'라고 쓴 커플은 그림을 참 멋지게 그렸네.
큼지막하게 쓴 십 년 전 날짜 남녀의 모습을 간략히 그렸는데 가운데에 하트도 넣었다. 내가 보기에는 술 마시러 와서 썼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런 흔적을 남겼다는 사실조차 잊었을 법하게 '흔한' 사랑의 기약이었다.
술집에서 한 인간의 서약보다 모나미 매직 자국이 오래 남는다.
- 글쎄, 지금은 헤어졌는지도 모르지.
나는 도토리묵을 반으로 자르며 말했다.
- 그 커플 지금도 잘 살고 있어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여자 사장님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사장님에 의하면, 커플은 몇 년 전에 힘든 일을 겪기는 했지만 여전히 잘 살고 있단다.
아우, 이 놈의 입방정, 남편의 말에 그냥 '어머, 그러네'만 했으면 딱 좋았을걸.
나는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말이 많다.
어디에서 한참 재미나게 떠들고 놀다가 집에 와서는 '에이 아까 그 말은 괜히 했나'라고 후회하는 일이 가끔 있다. 내가 토정비결을 안 봐서 그렇지, '금년에 구설수가 있으니 조심하거라'라는 경고가 적힌 쪽지 여러 장을 '읽지 않음' 상태로 묵혀버린 거다.
그렇지만 다행히 나이가 들면서 철도 같이 들어줘서 후회의 빈도는 점차 줄어든다.
게다가 입놀림에도 에너지가 필요해서 전처럼 왕성한 참견과 주장을 못 하는 이유도 있다.
옛날에 딸들을 키우면서 했던 말 중에도 피부에 박힌 조그만 가시처럼 영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는데 분명 거기 있다고 가끔 사인을 보내오는 가시.
가시를 데리고 살다가 어느 날 큰딸에게 말했다. 언제 언제 엄마가 네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 정말로 미안해, 진심은 아니었어.
큰딸은 진짜인지 거짓말인지 자기는 기억이 안 난다고 시크하게 말해주었다.
딸에게 뒤늦게 한 사과와 딸에게서 받은 용서 덕에 가시는 빠졌지만 흔적은 남을 것이다. 그래도 시간이 가면 그 자리가 다 아물고 이게 언제 생겼던 자국이지? 할 날도 분명히 온다.
몇 년 전 영화 <관상>을 보다가 꽤 충격을 받은 장면이 있다.
배우 조정석이 연기한 인물인데, 수다스런 자신 때문에 결국 화를 입고 조카도 살해를 당한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에게 벙어리가 되는 형벌을 내린다.
그때 '설화(사람의 말로 인해 생기는 재난)'가 진짜로 무섭구나 싶어 두려웠다.
천성이 어디 가지 않으니 나는 앞으로도 입이 무거운 여자는 될 수 없겠지만 큰 탈 없이 살아온 것에 감사하며 늘 주의를 기울여야겠다.
내게 남아있는 말들을 즐겁고 발랄하게 그러나 화살이 되어 남과 나를 찌르지는 않도록 바르게 쓰자.
군밤이에게 먹이려고 주문한 화식 샘플들과 특식 닭죽이 택배로 도착했다.
개 앞에 파우치들을 늘어놓으며, '어머, 이건 뭘까? 세상에, 너무 맛있겠다아, 그치?' 하고 호들갑을 하는 나를, 반려견 군밤이는 '아니 뭐 주면서 말하든가'하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시끄러운 보호자와 사는 군밤이는 서당 개가 풍월을 읊듯 3년 후엔 어쩌면 나와 커피챗을 할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