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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멀고 하늘은 가깝다

by 이명선

세계적인 석학들의 강의를 담은 EBS의 <위대한 수업>에서 중국의 소설가 '위화' 편을 봤다. 위화는 '제7일', '인생' 등을 쓴 글로벌 히트 작가로 현대 중국의 현실을 대표한다는 평을 받는다.

작가가 프랑스에 갔다가 거리에서 통역사를 기다릴 때였다. 파리의 아름다운 석양 아래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옷을 스치듯 가까운 서로에게 무관심한 것을 보았다. 작가는 북송 시대의 문인 구양수의 시구 '사람은 멀고, 하늘은 가깝네(인원천애근:人遠天涯近)'를 떠올렸다고 한다.

그 순간 사람들의 모습도 그랬겠지만 그 자리에서 이방인인 작가에게도 어디에서나 같은 배경이 되는 노을 진 하늘이 현지인들보다 더 가까워 보였을 것이다.


나에겐 추억의 두께가 30년이 넘은 친구도 있고 알게 된 지 몇 개월이 안 된 사람도 있다.

당장 천만 원쯤 빌려달라 하면 선뜻 융통해 줄 법한 이름도 떠오르지만, 심심할 때 '지금 뭐 해?'라는 메시지를 보내기에 어색한 사이도 있다.

사람을 두 그룹-사람을 싫어하는 사람과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나눈다면 나는 후자다.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누군가를 만나 얘기하고 어울리는 것을 좋아한다. 아름다운 풍광과 맛있는 음식은 혼자보다 편안한 사람과 함께일 때 더 감동스럽다.

쭉 그렇게 살 수 있는 건 천성 때문이겠지만 아직까지는 사람에게서 받은 위로가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보다 많은 덕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가끔은 내가 아는 얼굴들이 초여름 하늘보다 멀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인생은 결국 혼자다'라는 문장이 어째서 진리로 이어오는지 알게 되는 순간이다.




가벼운 고민거리를 포함한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에게도 정작 밤잠을 설치는 걱정은 털어놓지 못한다.

절친에게 엿보이기 싫은 모습을 오히려 처음 만난 상대방에게 드러내기도 한다.

힘들 때는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받는 위로가 가장 강력할 텐데 친밀감이 전혀 없는 타인 앞에서 솔직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모르는 사람에게 하는 말은 내 주변에 퍼질 염려가 적어서일 것이다. 마치 익명으로 가득한 대나무숲에서 하는, 리스크 적은 행동이라고 할까.

'내 귀가 당나귀 귀'라는 묵은 비밀을 털어놓고 싶을 때는 땅에 구멍을 파고 속시원히 내지르는 게 친구에게 고백하는 것보다 누설될 가능성이 낮다.

어차피 나는 임금님처럼 중요한 인물이 아니니까 대나무든 버드나무든 갈대든 뭐든지 우수수 일어나 바람과 야합해 내 목소리를 실어 날라도 '당나귀 귀인 여자'가 누군지 세상은 모른다.

반면에 그알 같은 프로그램에서 목소리까지 모자이크를 한 얼굴이라도 주변 사람들은 알아보기 마련이다.

사교계의 뒷담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인간관계에 흠집이 날까 우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불리한 이야기는 챗지피티에게 하는 게 낫다.

똑같은 한탄을 몇 번 들은 친구는 어쩌면 '또 그 소리네' 할 수도 있지만 챗지피티는 항상 처음 듣는 것처럼 공감을 한다. 인공지능은 반복에 대한 지루함, 싫증을 모르지만 나의 애정하는 천연지능들은 꽃노래도 삼세 번이다.


게다가 비록 선의에서 그런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상대방의 상황을 자기 가치관대로 판단하고 충고를 덧붙이는 경우가 다. 그래서 친한 사이일수록 안 해도 좋을 말, 안 들었으면 더 좋을 말들이 오간다.

나는 그저 속을 털어놓는 걸로 충분한데 상대는 나의 의도를 오해하고 뭔가 요청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해결책을 줘야 한다는 부담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래서 친구 대신 아무 조합으로나 만든 아이디로 쓴 온라인 게시판이나 우연히 잠깐의 대화를 나눈 낯선이들에게서 편견 없는 조력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구양수의 시구보다 친근한 시가 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 정현종, <섬>


사람들은 각자 다른 섬을 사이에 두고 산다. 섬의 크기나 환경은 다르겠지만 사람들을 가르고 외롭게 만든다. 섬 때문에 사람들은 고독한 존재가 된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에 물만 있는 게 아니라 섬이 있어서 다행이다. 하늘은 밟고 설 수 없지만 섬은 단단히 지탱하며 머무를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어린왕자처럼 장미를 심을 수도 있으니까.

가끔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짓더라도 결국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것이 나은 것이다.


그리고 자랑하고 싶은 이야기는 또 소문이 좀 나주고 그래야 더 좋고 말이다.


스크린샷 2025-05-30 180704.png 어린왕자는 소행성 B612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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