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같은
남편의 첫 승진
돌이켜보면 나는 남편이 '대리'가 되었을 때가 가장 기뻤다. 그 이후의 승진들은 대리가 되었을 때만큼 행복하지는 않았다. 분명히 모두 기쁜 순간이었지만 기쁨과 환희의 차이랄까.
동갑내기의 긴 연애 끝에 남편은 취업 후 바로 결혼을 했고 나는 결혼 후 바로 퇴사를 했다. 12월에 취업한 남편은 이듬해 2월에 졸업하고 4월에 결혼한 것이다. 우리는 스물일곱 살이었고 그 시절에는 결혼반지를 낀 신입사원이 드물지 않았고 결혼이 즉 퇴사인 경우도 적지 않았다.
남편의 첫 회사는 IMF 난리의 직격탄을 맞은 곳이었다. 일 년도 못 돼 첫 직장을 그만두고 잠시 숨을 돌린 남편은 두 번째 회사에서 작년 말까지 일하고 50대 중반에 명퇴를 했다.
첫 번째 승진은 남편을 비켜갔다.
어느 날 남편이 퇴근길에 전화를 하더니 집 근처에서 보자고 했다. 그날 남편은 대리 승진에서 밀렸는데 그저 빨리 와서 함께 저녁을 먹고 싶더란다.
내가 어떻게 위로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안 좋은 일이 생겨도 '별 것 아니다'라는 식으로 대응하는 스타일이었으므로 아마 그때도 비슷한 리액션을 했을 것이다.
마침내 남편이 대리가 된 날 나는 너무 기뻐서 어린 딸들을 부둥켜안고 방방 뛰었다. 나는 결혼 전에 두어 군데서 직장생활을 했지만 한 번도 대리가 돼 본 적이 없어서, 대리님이란 저 멀고 희미한 과장님보다 부러운 존재였다. 대리님의 자리는 우리 사원 나부랭이들의 책상을 모둠으로 묶어 한눈에 지배하는 위치에 있었고 내가 열심히 꾸민 서류는 대리님을 통과하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위로 갈 수 없었다.
그래서 대리가 된 남편은 나에게 엄청 높아 보였다.
(아, 남편은 직장인의 꽃이라는 이사가 된 적은 없으니까 '이사 사모님'이 된 심정까지는 모르겠다.)
작년 봄에 입사 3년 차 큰딸이 대리가 됐을 때 20여 년 전 남편이 대리가 된 그날이 자동적으로 떠올랐다. 그 소식도 무척 기뻤지만 딸이 대리님이 되었다니 내가 왕창 늙은 것 같아 풀이 좀 죽었다.
우리의 첫 집
'우리 집'에서 맞은 아침이 기억난다. 직전에 살던 전셋집은 큰방 겸 거실과 작은방, 욕실 하나가 있는 아파트였는데 2년 만에 거기를 떠나 거실이 따로 있는 우리 집에서 자고 일어난 날이었다.
사실 첫 번째 우리 집은 아니었다. 결혼할 때 시부모님이 지방 도시의 아파트를 사 주셔서 신혼집도 남편 명의였다. 지사에 있던 남편이 본사로 발령받아 올라오면서 신혼집을 팔고 전세를 얻었다.
우리 첫 전셋집은 지은 지 7년쯤 된 아파트 단지로 지하철역 바로 앞이었는데 정작 집주인은 한 번도 산 적이 없고 역세권 보금자리가 필요한 세입자들로 거주자가 바뀌었다.
집을 보러 다닌 때가 하필 겨울이라 서너 살 된 큰딸은 엄마에게 맡기고 젖먹이 작은딸만 포대기에 업고 집을 보러 간 적도 있다.
그렇게 전세 만기 후에는 '다시는 겨울에 집을 보러 다니지 않겠다' 결심하고 애들이 학교 들어갈 때까지 편하게 산다는 목표로 작은 아파트 1층을 샀다. 결혼하고 세 번째 집이자 법적으로는 두 번째 우리 집이었지만 내가 골라서 매수한 첫 집이었다.
아무튼 그 집에서 첫날밤을 잘 자고 일어난 아침이 어제 본 드라마처럼 또렷하다. 방문을 열고 나오자 햇살이 가득한 거실과 작지만 예쁜 주방이 보였고 그래서 나는 너무나 행복했다. 발코니 밖이 넓은 잔디밭이었고 아직 커튼을 달지 않았던 덕에 이른 봄의 햇살이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사실 사이즈로만 보면 신혼집이 더 컸었지만 그건 내가 선택한 집도 아니었고 집의 소중함을 일절 모르던 철부지였기에 나는 짧은 전세살이 경험 후 새로 산 작은 집이 마냥 좋았다.
두 딸들이 쓸 방에 이층침대를 놓고 분홍색과 연두색 커튼을 달고 내가 원하는 스타일로 상부장 없는 주방을 만들었다. 도서관에서 <작은집 인테리어> 같은 책을 빌려와서 펼쳐 놓고 소파를 이리 놓는다 저리 놓는다 부산을 떨었다.
그 후에 우리는 두 번 더 큰 집으로 옮겼지만, 그날 아침 맞닥뜨린 햇살만큼 행복감을 준 집은 없다.
부부의 첫 퇴직
첫 퇴직이라 쓰니까 이상하게 들리지만 나는 처음으로 퇴직 부부의 일상을 보내고 있다.
매일의 식사를 남편과 함께 먹으니 소위 세끼 먹는 '삼식이' 옆에는 '삼순이'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점심에 가리비오일파스타를 하면 남편이 저녁에 감자와 단호박을 듬뿍 넣은 비건카레를 한다거나, 각자 먹고 싶은 걸 알아서 해 먹거나, 가끔은 함께 장을 보고 요리를 하면서 매일의 끼니가 다채롭게 지나간다.
다행히 남편이 '밥밥'거리는 사람이 아니라서 남편의 퇴직 후 아내들이 가장 싫어한다는 밥 차리기의 고역을 내가 아직 모르는 게다.
감기약을 먹고 혼곤히 자는 아내를 깨워서 '나 점심 안 줘?' 하는 남편이 실제로 존재한다.
긴 연휴가 끝나도 퇴직 부부의 현생은 연휴 전이나 중이나 후나 똑같다. 하기 싫은 것은 거의 하지 않으며 살지만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면서 살지는 못한다.
그런데 예전에는 그렇게 하고 싶어서 적어놨던 것들, 낯선 곳에서 한 달 살기를 해 보겠다든가 아무 때나 차를 몰고 달려가 각종 뷰맛집 카페를 순례하겠다는 계획들이 별로 내키지 않는다.
퇴직과 동시에 내성적인 반려견을 새로 맞은 것도 이유가 된다. 아직 멀리 데리고 다닐 수 없는 상황이고 아침저녁으로 동네산책하는 것이 즐거움인 개를 저버리고 우리끼리 놀러 가기도 그렇다.
놀랍게도 퇴직 후 일 년이 다 돼가도록 우리는 거의 집에만 있고 집 근처만 나다닌다.
덕분에 돈을 쓰지 않는다.
퇴직자의 잔고란 대강 여며 놓은 도토리 자루와 같아서 항상 그 무게를 가늠하며 살아야 한다. 필요할 때마다 한 바가지씩 도토리를 퍼낼 뿐 더 담는 일은 별로 없을 테니 가급적 덜 퍼내야 평생 먹고살 수 있다.
그래서 우리 군밤이는 효녀다.
오늘도 남편이 만든 원목침상에 ㄷ자로 누워서 고개만 살짝 들고 "어때요, 내 덕에 어디 놀러 가지 않으니 돈 쓸 일도 없죠?" 하며 쳐다본다.
다음에 올 첫 단어들
과연 앞으로 어떤 첫 단어들이 있을까. 과거보다는 숫자가 적더라도 첫-으로 시작하는 말들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우리 부부가 창업을 하거나 새로운 방식의 삶을 시작할 수도 있고 딸들의 나이를 감안하면 첫 혼주 경험, 첫 사위와의 만남, 첫 손주 등이 내게는 완전한 처음들일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얻어지는 처음들이나 내가 노력해 만든 처음들이나 똑같이 소중하다.
살면서 손에 꼽을 만한 나만의 처음들-카페 운영, 유럽 여행, 그림책 번역, 유기견 입양 등등-조차 내 힘으로 된 것은 아니다. 가족들의 배려, 선배 언니의 추천, 그리고 보이지 않는 인연의 허락이 있었다.
내가 앞으로 어떤 처음들을 하나씩 건져내고 흠뻑 맞이하고 소중하게 간직하게 될는지 두근두근 기대하며 사는 것이 행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