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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옷 입히기

by 이명선

더 이상 회사에 가지 않는 남편과 함께 옷장 정리를 했다.

이제는 매일의 코디가 달라져야 한다. 그동안 남편은 휴일이면 늘 검은색과 남색 운동복만 입었다. 그러나 막상 퇴직한 지금은 '백수의 상징'이기도 한 추리닝을 즐겨 입기가 좀 머쓱할 거라 추측한다.

남편은 27년 간 사무직으로 일했다. 남편의 회사는 긴 세월 동안 흰색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싱글 정장을 입어야 했고 그러다 넥타이는 안 해도 된 지가 십 년이 못 된다.

최근 들어 회사가 수평적 기업문화의 하나로 '비즈니스 캐주얼 스타일'을 허용했다. 흰 와이셔츠 대신 체크와 스트라이프 셔츠를 샀다. 정장을 보관하고 블레이저, 카디건, 점잖은 디자인의 점퍼를 샀다. 그래도 나이와 직급을 고려해야 해서 하의는 착용감과 핏이 편안한 정장 바지를 고수했다.

말이 복장 자율화지 큰딸이 다니는 게임 회사처럼 '상하의를 입기만 하면 된다'거나 작은딸이 다니는 IT 회사처럼 '영어가 휘갈겨진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어도 이목을 끌지 않는 수준은 아니었다.


옷정리를 했더니 상의들은 그런대로 계속 입겠지만 당장 입을 만한 바지가 없었다.

퇴직자 님과 함께, 퇴직자의 여유로움을 반영하되 품위도 놓치지 않을 바지를 사러 나갔다.

우리는 데일리용 면바지를 샀다. 원단도 탄탄하고 구김도 잘 안 가며 촉감이 좋아서 혼방률을 보니 면 97퍼센트에 폴리우레탄 3퍼센트. 바지는 전체적으로 낙낙하면서 밑단으로 가며 살짝 좁아지는 테이퍼드 핏이었다. 지금부터 봄까지 입기에 적당한 두께였고 남편이 입고 나온 모습이 무난해서 베이지와 진그레이로 하나씩 샀다. 진한 회색은 슬쩍 푸른색이 돌아서 더 예쁘다.

거기에다 20년 만에 중청 칼라의 청바지도 샀으니 충분하다.


곧 다가올 설날에 본가에 갈 때도 퇴직자는 재직시절보다 옷을 더 잘 입어야 부모님이 안심하실 것이다.


새 면바지 두 개


지인의 남편이 옷도 혼자 잘 사 입고 들어오고 속옷이나 양말도 알아서 산다고 한다. 어른이 제 옷을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내 입장에서는 속옷까지 스스로 사서 입는 남편은 놀랍다. (처음 보는 팬티를 입고 있는 남편이라니 상상이 안 된다.)

나는 결혼한 후로 쭉 남편의 옷을 알아서 사다 놓았고 남편도 주는 대로 입었다.

시행착오도 있었다. 한 번은 새 옷을 보고 별 말이 없길래 맘에 드나 보다 했는데 시간이 지나도 절대로 입지 않았다. 남편으로서는 아내가 애써 골라온 옷이 사실은 별로였다고 말하기 미안했던 것이다. 결국 반품 시기를 놓치는 결과가 생겼다.


이제는 그의 취향을 어느 정도는 안다. 색은 튀지 않아야 하고 디자인은 심플하며 쓸데없는 장식이나 무늬가 없어야 한다. 오버핏보다는 몸에 잘 맞는 옷을 좋아한다.

남편은 키와 체격이 있고 중년 아저씨 뱃살도 아직 없어서 잘만 입혀 놓으면 보람이 있다. 남편이 치장을 좋아하는 성향이었다면 젊은 시절부터 월급을 꽤나 썼을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아서 다행이란 생각이 문득 든다.

시간도 많고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그런지 옷을 사러 가자면 잘 따라나서고 매장에서도 내가 입어보라는 대로 열심히 입어보는 게 웃기다.


요즘은 드라마나 예능을 볼 때 내 취향에 맞는 남자 코디가 나오면 관심이 간다.

브랜드는 중요하지 않고 느낌 좋은 원단과 클래식한 아이템에 숨겨진 디테일이 있는 게 좋다. 이번에 산 면바지도 뒷주머니 위에 엄지손톱 만한 로고가 박음질 돼 있는 게 포인트다.

함께 고른 옷을 입고 나온 남편이 앞에 서 있다. 골덴과 패딩으로 된 짧은 머플러를 목에 두른 게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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