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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쓰는 법 바꾸기

by 이명선

우리 집 옆에 새로 생긴 카페는 두 가지 원두 중 선택이 가능한데 고소한 맛과 산뜻한 맛으로 표현한다. 항상 고소한 맛을 골랐는데 어느 날 산뜻한 맛은 어떤 건지 궁금해서 그걸로 달라고 했다.

결제를 하고 나서야 산뜻한 맛은 더 비싸다는 것을 알았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꽃향기'가 나는 산뜻한 아메리카노는 천 원을 더 받는다고 했다.

풍미가 달랐을 뿐이지 4500원인 고소한 맛보다 20퍼센트를 더 내고 먹을 만큼 맛있지는 않았다.

잔을 반납하면서 '산뜻한 맛'이란 글자 아래에 작은 폰트로 천 원 추가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았다. 내 노안을 탓해야지.


퇴직 원년인 올초에 남편이 올해 1년 치의 생활비를 보내줬다.

손이 작은 나는 한 번에 받는 큰돈이 부담스러워서 예전처럼 매달 달라고 했지만 성실한 남편의 입장에서는 아내에게 일 년치 생활비를 주고 나야 안심이었을 것이다.

일 년 치 생활비 덕분이긴 해도 통장에 뜨는 숫자가 두툼해지니 기분이 좋았다. 정거장의 온열벤치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괜히 은행 어플을 열어보고 싶었달까.

가만있어봐, 내 주거래 은행은 평잔이 얼마면 고객 등급이 바뀌는 거지? 하고 찾아보기도 했다. (고객등급이 바뀌는 기준은 몇 억대였음)

이래서 사람들이 돈 쓰는 재미는 하수의 영역이고 모으는 재미를 알아야 고수라 하는가 보다.


나는 지금까지와 다른 무게의 책임을 느꼈다. 당장 쓰지 않을 하반기 생활비를 보관할 파킹통장을 찾다가 이자를 조금이라도 더 주는 단기 적금으로 옮겼다.

일 년 간 잘 나눠 쓰고 남겨서 금 한 돈이라도 사놓는 것이 목표다.




나는 각종 분야에 관심도 많고 어떤 면에는 나름 소질도 있는데 유독 돈, 재테크 쪽은 흥미도 별로 없고 눈이 어둡다.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고 스스로 공부해 본 적도 없었다.

돈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본 일이 없는데 결혼을 했다고 갑자기 가정 경제의 주체가 되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돈을 아껴야 한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아이들을 한창 키울 때 나의 이웃은 어린 자녀에게도 '지금은 이러저러해서 사 줄 수 없고 다음 달에 사 줄게'라고 말하는 게 맞다고 했다. 나는 '그건 어른들 사정'이고 아이들에게까지 신경 쓰게 할 필요는 없다고 반박했다.

그건 마치, 딸에게 '결혼하면 어차피 하게 될 살림이니 미리 배워서 잘해라' 하고 알려주는 엄마가 있고 '결혼하면 어차피 다 하게 될 텐데 벌써부터 하지 마라' 하고 집안일을 안 시키는 엄마가 있는 것과 같다.

(옳고 그른 것은 없고 차이가 있을 뿐이다)

다행히 내 딸들은 수십 만 원짜리 패딩 같은 것을 원한 적이 없었지만 설령 그랬다 해도 나는 분명 등골 패딩을 사 줬을 것이다.

누구네는 여자가 야물딱지게 모아서 지금 아파트가 몇 채네 하는 말을 들으면 머쓱해지면서 후회스럽기도 하다. 비록 재테크는 못 했지만 두 딸을 어디 내놔도 남부럽잖은 어른으로 키운 것을 지난날의 성과라 자찬하며 마음을 달랠 수밖에.


똑같은 생활비를 쓰는데도 남편의 신분이 현역인 것과 퇴역인 것은 소비의 자세에 영향을 미친다. 장거리를 매일 출퇴근하며 벌어다 준 돈을 받던 예전과 다른 기분이다.

정작 남편은 퇴직 후에 몸과 마음이 자유롭고 예전부터 관심 있던 일을 배우러 다니느라 꽤 행복해하는데 나는 편안해 보이는 남편의 돈이 어쩐지 더 아깝고 애틋하다.

이번 달은 내 운동클럽을 6개월 연장등록 했고 미용실도 적립금을 많이 준대서 선결제를 했고 반려견의 맞음비를 드렸고 아파트 관리비가 지난달보다 더 나왔다. 필요한 지출이었지만 잔고가 줄 때마다 소침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생각 없이 툭툭 사 먹는 커피값이 처음으로 아깝게 느껴졌다. 이 커피는 4500원의 자기 몸값을 하니?라고 내게 질문하면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았다.

그래서 매일 습관처럼 마시는 한두 잔의 커피는 집에서 먹는다. 원두를 갈고 물을 끓이고 드립을 하는 무념의 상태도 좋고, 보관만 하던 찻잔을 꺼내 골고루 쓰는 재미도 있다.

그저 무심코 써버리던 돈을 아껴서 이제는 가족이나 친구 그 누구와 함께일 때 더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달까.


적은 돈을 쓸 때도 필요한 것에 가치 있게 쓰고 싶다. 무엇이든 하나를 사더라도 좋은 것을 사고, 한 번을 나가 먹더라도 좋은 것을 먹고 싶다.

아무래도 지금은 '곶감을 빼먹는' 입장이다 보니 지출하기 전에 따져보게 된다. 돈 쓰는 마음이 달라지는 것이다.

살림을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매일 먹고 쓰고 입는 자잘한 소비를 무시할 수 없다. 몇 천 원씩 하는 항목이 모인 마트 영수증이 몇 만 원을 훌쩍 넘기는 일은 더 이상 '미스터리'가 아니다. 가랑비에는 옷만 젖는 게 아니고 양말까지 흠뻑 젖는다.

좋은 재료를 사는 것보다 버리는 일이 없게 다 쓰는 것이 중요하다. 식재료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몇 일치의 식비가 달라짐을 실감한다.


만 원 지폐 한 장은 만 원어치를 못 하고 사라지기도 하고 만 원을 훌쩍 넘는 큰 힘으로 쓰일 수도 있다.

자기를 회사에 내려주고 집으로 가는 엄마에게 큰딸이 사 준 모닝커피는 가격을 매길 수 없고, 도움이 간절한 유기견에게는 돈 몇 만 원이 생존의 영역까지 뻗는다.


돈의 가치는 소비가 만드는 것이 맞다.


큰딸이 사 준 커피의 가치는 백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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