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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24시간 같이 있기

벌칙 아님 주의

by 이명선 Jan 09. 2025

 남편과 24시간 같이 있은 지 보름째다.

 내가 운동을 하러 가거나 친구를 만나러 가는 시간은 빼니까 순도 백퍼 하루종일은 아니겠지만 결혼 27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호흡이 턱턱 막히는 폭염, 신발은 기본이고 바짓부리와 어깨까지 다 적시는 폭우, 그리고 폭설과 영하 20도의 한겨울에도 아침 6시 15분이면 나가고 저녁 8시에 집에 들어오던 남편이 출근을 하지 않는다.


 그는 명예퇴직을 했다.




 아직은 조금 휴가 같다. '퇴사자 인 더 하우스'의 실감이 들지 않는 상태이다. 또 남편이 원래부터 집안일도 잘하고 다정한 타입이니까 갑자기 집에 오래 머물더라도 마누라의 예민 레이더에 그다지 거슬리지 않는 걸 수도 있다.

 남편의 퇴직 후 나의 일상은 달라진 게 거의 없다. 

 아침 9시쯤 일어나고 운동을 가고 마사지를 가고 친구를 만난다. 점심 약속이 없는 날 혼자 대충 먹던 점심을 남편과 함께 먹는다는 점이 다르다.  

 

 남편도 회사에 다녀오지 않을 뿐 기상 시간은 똑같아서 아침에 문득 깨면 옆에 없다. 아침 6시 반에 지하철 좌석 대신 거실 테이블에 앉아서 출근길에 듣던 라디오 프로그램도 계속 듣는 것 같다.  

 사무실 대신 거실에 노트북을 놓고 회사일 대신 본인일을 한다. 

 매 번의 식사준비는 둘이 같이 한다. 요리하기를 즐기는 남편은 그동안 휴일에만 하던 요리를 매일 한다. 

 사실 이런 한가함도 1월 한 달이다. 2월부터는 늘 취미와 관심을 두던 분야를 본격적으로 배우러 나갈 채비를 끝냈다. 


 우리 부부에게 이십 여 년만에 백지로 주어진 1월 중 열흘이 어영부영 지났다.   

 회사에 다닐 때는, 퇴직만 하면 어디로 한 달 살기를 가자거나 6개월은 지치도록 놀자거나 하는 계획들을 세웠는데 막상 모든 게 가능해지니까 소극적인 자세가 되었다.

 좋은 데 가서 한 달 살기도 꽤나 번거롭다. 일단 우리 집을 비워두고 다른 데 가서 한 달을 있는 것도 간단치가 않다.  

 한 달은 너무 길다 싶어 일주일 여행도 고려했는데 추진력이 생기지 않았다. 시기적으로 한겨울이라는 점도 작용했고 얼마 전에 가족여행을 다녀오기도 해서다. 

 요새 우리나라가 정치경제사회적으로 불안하고 침울한 것까지 큰 요인이 됐다. 역사적인 위기를 넘겨보자고 저 고생들인데 같이 나앉아 있지는 못할망정 기성세대인 우리가 어디 가서 논다고 재미있겠나 싶다. 


 우리는 그동안 일하느라 놀러 다니지 못한 사람들도 아니니까 여행은 시급하지 않다.  





 '51대 49의 선택'이라는 말이 있다. 

 남편이 퇴직을 할 것인지 일단 회사에 남을 것인지를 고민할 때 나는 생각했다. 이건 51과 49야. 그렇게 중차대한 차이는 아니야. 이것도 좋고 저것도 나쁘지 않아. 딱 하루만 생각하고 그냥 맘 내키는 대로 해도 돼.


 오늘은 아빠의 퇴직 기념으로 딸들에게 줄 골드바(라고 해봤자 휴대폰 유심 사이즈)를 샀다. 십이지신을 상징하는 동물 중에서 딸들의 띠가 멋지게 새겨진 상품이다. 

 두 딸이 잘 커서 제 밥벌이를 하는 덕분에 남편은 퇴직을 선택할 수 있었다. 아마 딸들 중 하나가 아직 취업준비중이었다면 남편은 퇴직을 하고 싶어도 못 했을 것이다.

 남편이나 나나 더 큰 돈을 모으려는 마음도 없고 집을 두 개 가져 보겠다는 야망도 없이 작지만 포근한 현실에 만족하는 사람들끼리 잘 만났다.


 골드바 두 개를 결제하고 났더니 금값이 내려갔다. (아오.......) 

 내 인생아, 51대 49는 괜찮지만 52대 48부터는 입장이 다르니까 그렇게까지는 하지 말아 주라. 

 정중하게 애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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