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 명퇴 후 딱 한 달을 쉰 남편은 지난 2월부터 목공학교에 다닌다. 월부터 금까지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주 5일 수업이니 학생이 학교에 다니는 것과 매한가지다.
서해에 접한 도시의 가장자리에 있는 목공학교는 지하철역에서 학교까지 무료 셔틀버스를 운행한다. 남편의 작업대가 커다란 창문 앞에 있어서 바닷자락 너머로 마천루가 촘촘히 박힌 송도가 건너다 보인다고 한다.
남편은 가구를 만드는 목수 과정을 듣고 있는데 디자인부터 설계, 제작까지 논스톱으로 완성하는 일이다.
바다를 보며 좋아하는 톱질을 하고 망치질을 한다니 더 즐거울 것이다.
교육과정은 국비지원인데 수업료와 재료비까지 모두 무료다. 게다가 필요하다면 교육기간 동안 머물 수 있는 기숙사도 제공한다니 (재)취업을 지원하는 국가의 지원이 괜찮은 편이다.
교육생들은 점심을 나가서 사 먹는데 남편은 간단한 도시락을 가져간다. 점심시간으로 주어진 50분 안에 인근 식당가까지 다녀오려면 밥만 먹고 오기에도 빠듯하다며 남편은 브레이크 타임을 여유 있게 보내는 쪽을 택했다.
'도시락을 매일 싼다'고 하면 힘들지 않냐는 말부터 듣는다. 메뉴를 생각하는 것도 그렇고 준비 시간도 그렇고 수고로움도 그렇고 '도시락 싸기'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남편의 도시락은 어렵지 않다. 프라이팬 앞에 서서 공들여 달걀말이를 접거나 어떤 국을 끓일지 고민할 일이 전혀 없다. 보통 도시락 하면 떠올리는 밥과 반찬이 아니라 간단히 허기를 채울 식재료로 구성된 '빈 속 모면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도시락을 싸 간다기보다 간식거리를 가져간다고 하는 게 맞겠다.
편의점에서 손질한 과일을 한 컵씩 담아 팔던데 이런 스타일의 도시락도 수요가 있을 것 같다.
어른 손바닥 만한 스테인리스 도시락 용기에 구운달걀 두 개를 항상 기본으로 넣는다. 처음엔 압력밥솥에 직접 달걀을 구우려는 열의를 가졌다가 그냥 시판용 제품을 사기로 했다. 대신 조금 비싸도 1번이나 2번란으로 고른다.
그 옆쪽에 감자, 단호박, 고구마, 브로콜리 같은 구황 작물과 채소를 체인지파트너 식으로 지루하지 않게 교차해 찐 것과 약간의 과일도 곁들인다.
바나나, 방울토마토가 가장 만만하고 가끔 참외나 딸기, 사과 같은 것은 특별 게스트다.
재료 준비는 전날 밤에 다 해 둔다. 나는 데일리 찜요리를 위해 예쁜 찜기도 새로 장만했다.
남편이 등교 준비를 하는 동안, 미리 준비된 재료를 먹기 좋게 잘라 통에 담기만 한다. 도시락통을 주머니에 넣고 스틱형 레몬즙 하나와 포크를 넣고 묶으면 끝이다.
하루 종일 밖에 있는 성인 남자의 점심거리로 부족할 수 있지만 본인이 좋다니 그대로 해 준다.
아침으로 따뜻한 누룽지 한 그릇을 먹고 점심에 구황 도시락을 먹고 저녁에 집에서 밥을 먹으며 반주를 곁들이는 게 남편의 평일 패턴이 되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한국식 밥은 하루 한 끼 저녁에만 먹다 보니 두 달 동안 자연스럽게 살이 빠졌다. 이 나이에 저절로 붙는 중년 아저씨의 뱃살과 턱살이 생기지 않아서 좋다.
(퇴직 후에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듣는 인사말이 '퇴직하더니 편한가 봐? 얼굴 좋아졌네?'보다는 '아무래도 퇴직 후 이래저래 고민이 있겠지. 살이 좀 빠졌네'인 편이 낫다)
내가 아침 7시 10분 즈음에 우엉차 티백 두 개를 넣은 텀블러와 도시락 주머니를 식탁 위에 갖다 놓으면 남편은 가방에 넣고 둘러맨다.
2미터쯤 뒤에서 우리 집 개 군밤이가 이 광경을 매일 응시한다.
군밤이는 무슨 생각을 할까.
- 저 안에는 뭐 맛있는 게 들었나?
- 설마 아저씨가 내 오리가슴살 개껌을 가져가는 건 아니겠지?
- 에그, 아범이 아침마다 나가느라 고생하는구나(....?)
이런 생각은 안 할 것이다.
개는 예측가능한 루틴을 좋아한다니 그냥 '오늘 하루도 이렇게 시작되어 내 마음이 놓이는구나' 정도겠지.
목공학교 6개월 과정 중 절반이 되어간다. 남편은 요즘 서랍이 달린 짜맞춤 사이드 테이블을 만들고 있다며 사진을 보내줬다.
사진을 보니 갑자기 우리가 애들 어릴 때 살던 옛 집이 그립다. 딸들이 예닐곱 살 때쯤 남편은 취미로 주말 목공반을 다니며 내가 원하는 기능의 가구를 만들어 줬고 오랫동안 잘 썼다.
2월에는 가볍게 닫히던 도시락통이 요즘은 재료를 짓누르며 간신히 닫힌다. 어쩌다 보니 꾹꾹 눌러 담고 있다.
20년 전에 남편이 만든 원목 가구 중 두어 개는 지금도 쓴다.
이제 취미 수준이 아니라 제대로 배우고 있는 것 같으니 슬슬 휴대폰 갤러리에 '남편에게 주문할 가구' 앨범을 만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