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6. 나의 책상 위 과수원

by 이명선

매년 1월은 공모전 시즌이다. 메이저 방송사들과 미디어 그룹의 공모전 일정이 속속 열리고 지망생들은 당선의 열망을 가슴에 붙이고 달리기를 계속한다.

교육원 선생님은 우리에 '공모전에 내도, 안 된다'고 단언했다. 그리고 만에 하나 한두 작품이 괜찮았고 운도 따라줘서 당선이 된다고 해도, 탄탄하게 오래 준비된 실력과 아이디어 곳간이 없으면 밑천을 금방 드러내서 결국 치열한 드라마 씬에 남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하셨다.

나는 뜬금없이 이카루스를 상상했다. 엉성한 밀랍 날개를 달고 하늘을 질주하다가 태양 가까이 가지 말라는 아버지의 경고를 어기고 결국 추락한 비극의 주인공.

더디더라도 튼튼한 티타늄 날개를 만들 때까지 버틸 것인지, 일단 밀랍 날개를 달고 뛰어오르지만 너무 거창하지 않게 슬쩍 떠서 날아 보는 것에 만족할 것인지, 뜨겁게 날아오르고 불사른다 주의로 갈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이다.


나는 A4네 장 짜리 과제 하나에도 일주일이 꼬박 걸리고 그렇게 오랫동안 쓰고 고치고 쓰고 또 고친 줄거리가 마음에 들지도 않는다. 마감 시간이 있으니 낸 것이다.

그러니 내가 만약 이카루스라면 지금은 밀랍 날개의 뼈대를 만들기는커녕, 새들이 떨어뜨린 깃털을 주워 모으면서 '어, 다시 보니 이건 개털이었네'하는 단계다.



나는 사과 농부다

사과를 시장에 내다 팔아 돈을 버는 농부는 어떤 사과를 출하해야 할까. 당연히 상품으로써 하자가 없고, 맛과 모양이 모두 좋은 사과만 골라 내놓아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돈을 주고 산다.

막 사과 농사를 시작한 농부가 나름 재미도 있고 이만하면 사과도 괜찮은 것 같으니 ‘시장의 반응이나 한번 볼까’ 하는 마음으로 매대에 올린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 과수원은 품질이 그저 그런 사과를 파는 곳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곧 농부는 작가이고, 사과는 작품과 같다.


선생님의 비유를 노트에 잘 적어두었다.

나는 책상 위의 여덟 뼘 과수원에서 이제 겨우 사과나무를 어떻게 심을지 구획 설정을 하느라 말뚝을 박고 있다. 땅을 갈고 나무를 심어 돌보고 열매가 맺어 탈없이 익기를 기다리려면 아직도 멀었다.




이강 작가의 12부작 드라마 <미지의 서울> 대본집을 샀다. 내가 올해 재미있게 본 드라마인데 대본집이 나와있어서 반갑고 고맙고 좋은 징조로 여겨졌다.

대본을 읽으면 드라마의 장면들이 기억나고 테마곡도 흥얼거리게 된다. 나는 티브이에서 시청예약을 해 놓고 본방 사수를 했었다.

1화를 구성한 씬을 평균 60개로 잡으면 총 720개의 씬이다.

2026년 1월 1일부터 이 대본을 모두 따라 쓰려고 한다. 저번에 첫 필사 연습으로 역시 이강 작가의 60분 단막극 대본을 이틀 동안 따라 쓰고 드라마를 봤다. 비슷한 진도로 보고 1화 필사하는 데 이틀씩 잡으면 넉넉잡고 한 달이면 끝난다.


내 지병인 퇴행성 손가락관절염이 나아지기는 힘들겠다 싶은데 할머니 생각이 난다. 하루 종일 일거리를 찾아 집안일을 하실 때 고만 좀 쉬시라고 하면 하시던 말씀이 있다.


- 놔둬. 죽으면 썩을 몸, 움직일 수 있을 때 꿈지럭거려야지.


그래! 나도 이미 구부러진 손가락, 아프지만 않으면 열심히 따라 쓰자.


막 사과 농사를 시작하는 기분이 제법 산뜻하다.

내 책상 위 사과나무 묘목에도 해가 쨍하고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천둥번개가 치겠지. 지난한 순간과 고통이 바쳐지면 비로소 분홍과 흰 꽃이 피고, 그다음이 되어야 그 자리에 완두콩 만한 아기 사과가 찾아올 것이다.


<미지의 서울> 대본집 두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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