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평 시간에 동기들의 줄거리를 읽다 보면 기존 드라마나 영화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가 없을 만도 하고 사람들이 흥미로워하거나 좋아하는 이야기가 한정적이기도 하다.
남자 주인공의 이웃에 사는 남자가 죽었는데 그의 아내가 범인인지 자살인지 미궁에 빠지는 내용은 <헤어질 결심>을 소환하고, 순박한 시장 상인들이 주인공과 힘을 합쳐 투자 사기범을 추적해서 경찰에 인도하는 내용은 한 번쯤 영화에서 본 것 같다. 그렇지만 그런 스토리는 여전히 재미있고 결말이 궁금해진다.
선생님은 우리가 대본을 처음 쓰는 습작 단계이기 때문에 '이게 표절인가'하는 걱정 따위 집어넣고 기존 작품을 레퍼런스로 삼아 쓰거나 아예 좋아하는 작품의 뼈대에다 나의 시각을 덧입혀 베껴 써 봐도 된다고 했다. 대본 쓰기에서도 훌륭한 작품을 따라 쓰는 것은 좋은 방법이다. 그림과 음악을 배우는 사람들이 명작을 모방하며 연습하거나, 개발자들이 실제 인터넷 서비스나 앱의 프로그래밍을 클론 코딩하는 것, 그리고 소설 지망생들이 유명 작품을 필사하는 훈련 방법과도 같다.
나는 좋아하는 드라마 대본집 세 권을 사서 책상에 꽂아 두고 틈틈이 본다. 내가 산 책들은 전부 미니시리즈의 대본이라 지금 쓰는 단막극과는 꽤 다르지만, '이런 장면을 대본에 어떻게 구현하지?' 하는 순간에 큰 도움이 된다.
주인공이 받은 휴대폰 문자 내용을 어떻게 표시할지, 여러 장면들을 한 컷씩 보여주고 싶을 때 어떤 식으로 적는지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열흘 안에 나는 A4 서른 장의 대본을 다 쓰고 마지막 부분에 '끝'이란 글자를 입력할 수 있을까?
종강까지는 계속 수정할 시간이 있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하고, 바다로 간다더니 산으로 가는 대본이라도 일단은 완결을 지어야겠다.
습작생 단계의 시놉시스 쓰기
제목 - 주인공의 이름 혹은 특징을 살린 별명으로 제목을 짓고 의도적으로 주인공에게 집중하자.
로그라인 - 누가 어떤 딜레마에 어떻게 나서는지를 매력적으로 쓰는 한두 문장
기획의도 - 습작생은 생략 가능
등장인물 - 대본에 드러나지 않는 중요한 정보, 이력을 포함한다.
줄거리 - 숨기지 말고 반전까지 다 보여주기
톤 앤 매너
첫 단막극 대본을 A4 18쪽 정도 썼다. 그런데 어째 쓰면 쓸수록 처음에 생각한 것과 다르게 흘러간다. 우리 반의 과제는 고전소설 각색이고 나는 <우렁각시>를 바탕으로 쓰는 중인데 '여자 주인공이 남자의 집에 몰래 밥을 해 놓고 간다'는 설정 말고는 우리가 아는 우렁각시의 키워드나 테마가 드러나지 않아 고민이다.
분위기가 점점 코미디로 가는 느낌도 든다. 내가 원래 '유머'를 좋아해서 그런 건가 씬이 늘어날수록 코믹하려고 애쓰는 거 같다.
그래서 객관적인 눈으로 읽어 보면 유치하다.
이야기의 톤 앤 매너를 일관적으로 유지하는 일마저도 습작생에게는 어렵구나.
이 와중에 히가시노 게이고의 <붉은 손가락>이 재미있다는 소리를 듣고 도서관에서 빌려와 320여 쪽을 한나절 만에 읽었다. 역시 재미있는 책은 중간에 쉴 수가 없다.
<붉은 손가락>은 게이고의 60번째 소설이라니 그 마르지 않는 창의성을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범죄 소설을 좋아하고 드라마는 치정 스릴러를 주로 찾아 보면서 막상 단막극 대본을 쓰라니 로맨스 코미디를 쓰게 되니 아이러니하다.
우렁각시가 집주인 총각을 스토킹하게 되었고 그 남자가 새 여자친구를 사귀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격분해서 살인이 일어나는 이야기를 누가 써 주면 신나게 볼 거 같은데 말이다.
정작 내 이야기 속에서는 어느 한 사람도 슬프게 만들거나 악독하게 그리지 못 하겠는 새가슴을 어째야 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