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쓰고 있는 첫 대본에 깔리는 심리적 배경이다.
처음에 쓰려던 대본의 심리적 배경은 30대 초반 남녀의 마시멜랑한 썸이었는데 이게 내 처지와 거리가 멀다 보니 영 진도가 느렸다. 내가 서른 살이던 20세기의 시대극도 아니고 2025년 지금 내 딸 같은 서른 살 애기들이 대체 어떤 식으로 대화를 하고 어떻게 썸을 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첫 대본 제출 마감 이틀 전에 급선회한 소재가 바로 '잃어버린 반려견을 찾는 세 시간 동안의 일'이었다.
주인공이 개를 찾아 헤매는 세 시간 동안, 원고지 안에서는 때 아닌 우박도 내리고, 화물 트럭이 위험하게 지나가고, 무거운 다리를 끌면서 간신히 달리는 모습 등을 넣으면서 억지로 억지로 끝을 냈다. 그래도 A4 35매 내외보다 한참 부족한 25매로 초고를 냈다.
지난 11번째 수업 때는 합평을 통해 수정 방향을 잡았다.
내 대본에서는 주인공과 대척점을 이루는 관계가 없는 점, 주인공의 내면적 장애가 보이지 않으니 내면적 초목표가 세워지지 않는 점, 사건의 진행이 너무 느린 점 등을 지적받았다.
초고의 수정 방향으로는 주인공과 대립하는 인물로 남편을 세우고 주인공의 내적 장애를 만들었다.
그래서 나온 설계가 '빈둥지 증후군에 빠질 뻔한 갱년기 여성이 자식은 떠났지만 곁에 남은 노견을 통해 상실감을 치유했다가 그 노견을 떠나보내고 다시 펫로스증후군에 빠지며 남편과도 멀어진다. 남편은 아내를 위해 유기견을 입양한다. 주인공의 닫힌 마음으로 내내 정을 주지 못 하다가 그 개를 잃어버리고 가까스로 찾게 되면서 남편과의 관계까지 회복한다'는 내용이다.
빈둥지, 갱년기, 펫로스 이 분야는 내가 실제로 경험했으니 술술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설명하기가 아닌 보여주기로 채워야 하는 대본 형식으로, 단막극이니까 시간적 배경을 가능한 한 짧게, 최대한 회상이나 과거나 독백 장면 없이, 캐릭터 간의 강렬하고 극적인 부딪힘을 넣어서 쓰려니 이 또한 너무 어렵다.
메인플롯과 서브플롯
책을 보니 이것이 바로 메인플롯과 서브플롯이다.
겉으로 보이는 이야기, '개를 잃어버리고 우여곡절 끝에 찾는다'가 메인플롯이고 주인공이 개를 찾으러 뛰어다니는 동안 풀어가는 이야기, '펫로스로 우울감에 빠지고 남편과도 멀어졌다가 극복하게 된다'가 서브플롯인 셈이다.
다행스럽게도 선생님은, 서브플롯의 이야기는 개를 찾으러 다니는 여정 중간중간에 회상 씬으로 넣어도 된다고 하셨다. 그러나 어떤 장면에서 과거를 들춰내느냐가 관건이다.
합평 이후 일주일이 다 되도록 수정을 시작하지 못했다. 2막을 채우던 씬들-개를 찾아 헤매던 장면을 과감하게 삭제하고 나니 이번에는 전체 분량이 훅 줄어서, 마치 껍질만 까놓고 들고 있던 바나나 반쪽이 어디론가 사라진 느낌이다.
머리를 식힐 겸 유명 극본공모전 당선 작품들을 읽어 본다.
겨우 두 달 반 공부한 나보다 훨씬 빨리 시작해서, 많이 쓰고 오래 쓰고 그만큼 몇 십배로 두들겨 맞았을 선배들임을 감안해도 그들의 극본은 정말 재미있고 기발하고 치밀하다.
지망생들의 꿈인 당선 작가들조차 대본을 수년간 쓰고 고치고 회의하고 밤을 새워 일해도 결국 그 작품이 드라마로 방영되지 못하면 다시 공모전으로 돌아오는 게 현실이라고 한다.
이 길로 발을 들이기 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역시 내 길이 아닌가 보다'라는 생각의 두더지 잡기 게임이 시작됐다.
망치를 굳게 들고 내리칠 준비를 한다.
두더지 1 미안하지만, 넌 너무 늦(늙)었어!
두더지 2 쯧쯧, 타이핑이 손가락관절염에 나쁘다는데.
두더지 3 아니, 왜 사서 고생을 하고 난리야?
두더지 4 개론반 끝나면 그냥 포기해. 이건 돈 낭비야.
그런데 두더지게임에서 이기고 지는 게 있던가?
내 기억으로 두더지게임은 스트리트 파이터처럼 YOU WIN! 혹은 YOU LOSE! 가 없던 것 같다.
일단은 시작한 게임을 끝까지 하는 것만 목표로 하자.
결국 바닥에 엎어져도 내게 남는 것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