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남자친구를 만나다 -작은딸 편
벌써 두어 달 전 일이다.
어찌어찌하다가 우리 부부는 두 딸의 남자친구들을 한 달 간격으로 만났다.
특히 작은딸 커플은 5년이 넘게 만나는 동안 나 혼자 우연히 남자애를 잠깐 봤을 뿐이었는데 남편의 퇴직 후 상황이 맞으려니까 금방 진행이 되었다.
동생이 해마다 찍는 기념일 사진을 다섯 장 남기는 동안, 일에만 재미를 붙였던 언니는 이제 연애를 시작한 지 막 1주년이 되었다. 지금은 큰딸에게 일과 사랑 어느 게 더 재미있는지 알 도리가 없다. 그래서 남편은 어땠는지 몰라도 나는 큰딸의 남친이 몹시 궁금했다.
작은딸은 시시콜콜 얘기를 잘 해주는 반면, 큰딸은 자기 이야기를 별로 들려주지 않는 편이라 더욱 그랬다.
20대 중후반이 된 딸들의 남자친구는 어떤 존재인가.
이대로 가면 우리 집 사위로서 족보에 오를 것이고, 각자 다른 길로 접어들면 볼드모트처럼 언급할 수 없는 이름이 될 것이다.
이야기는 연장자 순이 아니라 만난 순서이고 연달아 쓰기엔 길 것 같아 두 편으로 나눠서 펼치기로 한다.
(혹, 누가 사위로 남고 누가 볼드모트로 남을지 모를 미래를 대비해서라도 두 편이 나을 것 같다...)
작은딸 커플과의 만남을 앞두고 식사 장소의 선정에 심혈을 기울였다. 우리 집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메뉴가 문제였다. 다양한 잣대를 대고 고른 끝에 상견례를 많이 한다는 일식당의 조용한 방으로 예약했다.
일단 무슨 날이 정해지면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렇듯, 나는 무엇을 입어야 하나를 두고 잠이 안 올 때마다 누워서 생각했다. 딸의 남자친구 입장에서 나를 볼 때 너무 차려입으면 부담스러울 테고 편하게 입어도 예의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매일 밤 퀸스 갬빗의 심정으로 어두운 천장에다 상하의에 신발, 가방까지 그려댔다.
또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렇듯, 어째선지 이 많은 옷들 중 이토록 중차대한 날 입을 옷은 항상 없는 건지!
코디를 고민할 때는 좋아하는 브랜드 매장의 마네킹을 따라 하라는 명언을 생각했을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모 영화의 무대인사에서 본 김희애 언니였다.
평소에도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입는 여배우는 그날 진청색의 깔끔한 스트레이트핏 청바지에 아이보리색 타이 블라우스를 받쳐 입고(긴 리본은 묶지 않고 늘어뜨렸다) 밀크초콜릿색 스웨이드 재킷을 툭 걸친 모습이었다. 그 코디가 자연스럽고 편안하면서 마음에 들었었다.
내가 그녀를 실제로 본 것이 처음이었기도 하고, 그때와 비슷한 계절이었기도 하고, 무대인사 같은 행사야말로 너무 꾸며도 안되고 너무 안 꾸며도 안 되는 자리였기에 내 상황과 딱 맞았다.
게다가 흰 타이 블라우스가 이미 있었기 때문에 나는 옳다구나 하고 핑계 삼아 초코색 스웨이드 재킷을 샀다.
물론 비슷한 아이템을 입는다고 비슷한 느낌이 나는 것은 아니지만 내 인생 최초로 '딸의 남자친구를 만나 밥을 먹는 자리'에 적당한 코디였다.
딸 커플은 예쁘게 차려입고 왔다. 나중에 들으니 남자친구는 아침부터 미용실도 다녀왔단다. 남자친구 혹은 여자친구의 부모님을 만나러 갈 때 얼마나 긴장을 할는지 경험해 본 사람들은 잘 안다.
모든 약속에 일찍 가는 남편은 역시나 도보 5분 거리의 식당에 30분 전부터 가려고 했고, 나는 작은딸로부터 '절대로 일찍 오지 말고 정각에 들어오라'는 경고를 받았다.
한번 건너는 횡단보도의 신호등을 일부러 넘겨가며 느리게 느리게 걸어갔지만 우리는 결국 약속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도착했다. 작은딸 커플은 이미 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부모 측이 나중에 도착하는 모양새가 훨씬 좋은 것 같다. 그래서 그다음 큰딸 커플과의 약속에 우리는 아예 느지막이 갔다.
첫 만남에 으레 그렇듯 남자들은 반갑게 악수를 나눴고 우리는 자리에 앉았다. 앉자마자 내 눈에는 창가에 놓인 꽃다발과 쇼핑백이 보였다.
오호, 기특한 것, 나에게 주려고 가져왔구나!
사실 딸과 내가 가장 염려했던 것은 남편의 과묵함이었다. 딸의 남친도 원래 말수가 적다지만 자리가 어려워서 더 말을 못 꺼낼 것이고 우리 집의 두 E인 작은딸과 내가 분위기 메이커를 하자고 약속을 했다.
그러나 웬일로 남편이 먼저 대화를 시작하더니 적절한 농담도 하고 새로운 음식이 나올 때마다 걸맞은 화제를 능숙하게 꺼냈다 넣었다 하는 것이었다.
대각선으로 맞은편에 앉은 작은딸과 나는 의외의 분위기에 놀라 시선을 교환하며 '아빠가 웬일이지?' 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집 앞 카페로 옮겨서 커피를 마셨다.
작은딸도 남자친구도 처음보다 한층 편안해 보였다.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라고 하길래, 때는 이때다 하고 현재 박사 수료생(박사 과정은 마치고 논문을 쓰는 상태)인 남자친구에게 정말로 궁금한 것들-연구 분야의 전망, 취업 가능성이 있는 기업명을 포함한 구체적 향후 진로-을 물어보았다. 남자친구는 비전공자인 나의 수준에 맞게 상세히 대답을 해 주었다.
데이트하러 가라며 아이들을 먼저 보내고 우리 부부는 카페에 남아 얼마간 더 이야기를 했다.
나는 남편에게 OO이를 만난 느낌이 어떤지 솔직하게 말해보라고 했다. 답을 피할 줄 알았는데 남편은 주저 없이 '난 좋은데'라고 했다. 이유를 물으려는 순간 남편은, '나는 우리 딸이 좋다면 다 좋다'는 원론적인 설명을 덧붙이며 추가 질문을 차단해 버렸다.
이번에는 남편이 툭 한마디를 했다.
- 근데 당신은, 애 부담스럽게 뭘 진로 이런 걸 물어봐.
자기도 궁금했을 거면서, 하고 나는 눈을 흘겼다.
신경 쓰이는 숙제를 하나 마친 것 같은 기분은 나와 남편만 아니라 작은딸 커플도 마찬가지였을 터다.
두어 시간의 만남은 두어 달이 지나면서 그날 함께 먹은 메뉴가 A코스였는지 B코스였는지도 가물가물한 것처럼, 추억은 이미 풍화작용 속에 들어가 나중에는 '우리가 만났었다'는 사실만 남을 수도 있다.
그 아이가 내 사위가 될 상인지 아닌지 나는 모르겠다.
그래도 처음으로 딸의 남자친구를 만난 경험을 했고 그날 앞에 앉은 아이들을 보면서 참 예쁘고 흐뭇해서 행복했으니 그것으로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