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진하는 재미 vs 안정적인 생활
첫 회사에 29살에야 국내 대기업에 입사를 하게 된 난 곧 나이 어린 선배 사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군에 다녀오지 않았을 여자 선배나 군대를 다녀왔더라도 26살에 입사한 남자 선배와도 3년, 혹은 그 이상 차이가 났기 때문에 직급이 나이에 비해 낮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별거냐고? 회사에서는, 특히 국내 대기업에서는 그게 참 별게 아닐 수 없었다.
왜 그런 문화가 정착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모든 게 소위 ‘짬’ 순으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장유유서로 설명할 수 있는 위계 문화 때문일 거로 보는데, 보통 나이순으로 결정되는 위계질서가 회사에서는 경력 순으로 결정된다. 하지만 이것도 경력이 차면 찰수록 경력 순이 아니라 능력 순으로 위계질서가 형성되는 걸 볼 수 있다. 여기서 능력이란 업무 능력뿐 아니라 정치력과 아부력 이 모든 걸 포함한다. 따라서 사회 초년생 시절 나보다 어린 혹은 나보다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선배 노릇을 한다고 하여 이게 영원할 거라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직장을 옮길 수도 있고, 그 선배가 옮길 수도 있으며, 혹은 어느 시점에 본인 능력을 인정받아 앞서 나갈 수도 있는 노릇이다.
하지만, 내 사회 초년생 시절에는 이런 걸 몰랐다. 안 그래도 늦은 나이에 취직하는 것도 속상한데 아주 조금은 나이 어린 선배들의 갈굼을 당해본 경험이 있는지라 한마디로 이런 꼴을 보기 싫었다. 자기가 경력이 많으면 많았지 그게 뭐? 란 생각을 했고, 실제로 1~2년 더 일한 경험이란 게 뭐 대단한 게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위계질서 자체에 대해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더 견디기 어려웠다. 인간은 동등하다는 게 기본적인 내 생각이기 때문이다. 특히 회사에서 선배 사원이 후배 사원을 아랫사람 취급하는 건 잘못된 관행이라고 생각한다.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을 챙겨줘야 하고 잘못하면 알려줘야 한다는 생각은 틀렸다고 생각한다. 회사에서 내가 일하는 건 계약 관계에 불과하다. 떠나면 아무것도 아닌 관계가 회사와 직원 관계다. 따라서 그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 역시 계약에 기반한 관계로 봐야 한다. 이런 생각 때문에 난 ‘선배’란 말을 회사에서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선배가 아니라 동료이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 때문에 나는 사회 초년생 시절에는 승진을 빨리하고 싶었다. 앞질러 가고 싶었던 마음이 크다. 내가 윗사람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랫사람이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 그 덕분에 경력에 비해 승진은 빨리 한 편이다. 경력 3년 차에 대리, 경력 5년 차에 과장이 되었고, 경력 15년 차에 이사가 되었다. 그러면 이제는? 더 승진할 욕심이 없다. 물론 승진시켜주면 감사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보다 지금 하는 일을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이사로 은퇴해도 좋다는 생각도 든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아마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다. ‘안주하지 말고 더 노력하고 정진해서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라는 질문을 할지도 모를 노릇이다.
여기서 국내 대기업과 외국계 기업이 차이가 난다. 혹은 국내 대기업과 외국계 기업이라서가 아니라 회사 문화에 따라 더 큰 차이가 나는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국내 대기업은 승진 제도가 있(었)다. 사원, 대리, 과장, 차장, 부장, 그리고 꿈의 자리 임원 등, 경쟁을 해 이겨 승진을 하는 그런 제도 말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다니는 회사는 사실상 승진 제도가 없다. 내가 하는 일에 인정을 받아 더 큰일을 하게 돼 Job Title이 바뀌지 않는 한 한국 대기업과 같은 승진은 없다. 즉 같은 팀에서 같은 업무를 하면서 대리가 과장이 되는 일은 없다는 뜻이다. 물론 승진을 하지 않더라도 연봉은 조금씩 오르긴 하겠지만, 내가 계속 같은 일을 한다면 승진은 없다. 게다가 이사급인 내 업무를 하면서 정년을 맞아 은퇴하는 일도 가능하다. 많은 대기업에서 부장~이사급이 정리 대상 1순위인 것과는 참 결이 다르지 않을 수 없다.
도전정신이 강한 대부분의 한국인에게는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나 역시, 이 회사에 처음 입사해서는 사실상 승진이 없다는 이야기에 놀랐고, 조금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하는 일을 잘하고 있다면, 그리고 기대치를 넘는 성과를 냈다면 쉽지는 않지만 승진을 할 수도 있고, 얼마든지 조금씩 직무를 바꾸어 일하는 게 가능하다. 어느 쪽이 더 나은지는 잘 모르겠다. 몇 년마다 승진을 시켜주면서 직원을 고무시키는 게 좋은 건지, Job Title이 바꾸기 전까지는 승진은 없지만 안정적인 직장 생활을 하게끔 하는 게 좋은 건지 말이다.
도전정신이 조금씩 줄어드는 나이가 되어 그런지 아니면 내가 가진 시간을 회사뿐 아니라 가정과 내 개인 취미 생활에도 쏟고 싶은 생각이 더 강해져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최근에는 이런 회사의 방침이 난 마음에 든다. 오히려 이런 방침 덕에 내가 하는 일에 더 몰입할 수 있게 해 주는 거 같다. 내가 승진을 거듭하는 상황에 서면 지금 하는 일은 거쳐가는 일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내가 은퇴할 때까지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내 것처럼 일에 몰입할 수 있다. 물론 회사와 나는 계약 관계다. , 이왕 급여를 받으며 일하고 시간을 쓰는데 일에 몰입을 하면서 혹시나 재미도 느낀다면, 일석이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