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죄책감에 휩싸이며 눈앞이 하얘졌다.
중학교 때의 이야기이다. 나는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치어리딩 동아리의 홍보문을 보게 되었고, 관심이 생겨 바로 가입 신청을 하였다.
동아리에 들어온 지 일주일이 됐을 무렵,1학년 단장을 뽑는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나는 평소 안무를 짜거나 사람들을 대표해 이끄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고민 없이 바로 지원했고, 후보로는 나와 A가 나왔다. 하지만 A는 일이 생기면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는 성격이라 공약 발표 당일까지 공약을 준비해오지 못 해서 내가 단장이 되었다. 선배들과 부원들 모두 나를 축하해줬고 아쉬움을 표출하던 A도 언제 그랬냐는 듯 나를 축하해줬다.
나는 단장이 된 당일부터 바로 안무를 짜고 한 달 간의 스케줄을 보내는 등 단장으로서의 책임을 다 했고 시간이 지나 어느덧 나는 2학년이 되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고민은 많아지고 할 일도 점점 늘어나는 게 당연했다. 새 학기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중간고시가 들이닥쳤고 체육대회도 함께 왔다. 한 무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최소 한 달의 시간 동안 연습을 해야 하는데 나는 안무도 짜야하기 때문에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중간고사 공부로 인해 정신이 없던 나는 일을 미루고 미루다보니 안무를 짜지 못 했었다. 이 일이 사건의 시발 점이였을까.
선배들을 나를 꾸중하며 이 일을 계기로 단장을 다시 뽑겠다고 통보하여 나는 하루아침에 부장 자격이 박탈되었다. 내 자신에게 화도 났지만 하루아침에 이런 일을 당하니 어이가 없던 나는 다시 후보에 지원했다. 이번에도 나와 A만 지원하였다. 단장 자리를 뺏기고 싶지 않았던 나는 정말 이를 갈면서 공약을 준비했다. 그리고 공약 발표 당일, A는 역시나 공약을 준비 해오지 않았다. 나는 한시름 놓으며 수월하게 다시 단장 자리를 되찾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내 예상과는 다르게 A가 단장이 되었다. A는 그저 열심히 하겠다는 말 한마디만 했을 뿐인데 단장이 되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이미 결과는 정해졌고 나의 잘못도 있는 문제기 때문에 결과에 순응하며 찝찝한 기분으로 A를 축하해줬다.
A는 예상 외로 성실하게 일에 임했고, A의 활약으로 우리는 치어리딩 협회에서 주체하는 큰 대회에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연습도 학교가 아닌 협회에서 제공한 곳에서 연습할 수 있었다. 연습실에 가니 사람들이 많았는데 치어리딩 판이 좁다보니 대부분 서로 알고 있는 분위기라 나 역시 아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 때 B가 다가오며 말했다. “너 단장 일 진짜 열심히 하나보다.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이 말을 들은 나는 조금 울컥했지만 침착하게 말했다. “나 이제 단장 아니야. 어쩌다보니까 A가 단장이 됐어.” B는 나를 비웃는 건지 의아해 하는 건지 모르겠는 표정으로 작게 읊조렸다. “진짜 그랬나보네.” B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나는 다시 물어보고 싶었지만 연습이 시작할 시간이라 다음에 얘기하자며 B와 헤어졌다. 연습이 끝나고 집에 가던 길에 나는 B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B와 오늘 하루 동안의 얘기를 하던 찰나 아까 B의 의미심장한 말이 떠올라 무슨 말위였는지 물어봤고 B는 대답했다.
“사실 A가 너 단장인 거 맘에 안 든다고 꼭 자기가 단장이 될 방법이 있다고 했거든.” 나는 대답했다. “그 방법이 뭔데?” A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이간질, 그게 제일 쉽고 편한 방법이잖아.” 나는 A의 대답을 듣고 잠시 멍해졌었다. 도대체 뭘 어떻게 했기에 일이 이렇게 됐는지 궁금했었는데 그 궁금증이 풀리면서 화가 머리끝까지 솟았다.
중학생은 친구 관계에 한창 예민할 시기이다. 그러니 나는 이성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이 떠오르며 나는 곧장 선배들에게 연락했다. “선배 저 A에 대해서 할 말이 있어요.” 중요한 대회를 앞두고 있다 보니 선배들은 곧장 나에게 왔다. 나는 뜸들이지 않고 말했다. “사실 A가 뒤에서 선배들 엄청 욕 하고 다녀요. 알고 계셨어요?” 선배들은 잠시 서로의 눈치를 살피다가 말했다. “사실이야?” 이 말을 들은 나는 잠시 양심에 찔렸지만 대답했다. “네, 정말이에요.” 선배들은 내 대답을 듣곤 말없이 가버렸다.
다음 날, 연습이 없는 날인데도 불구하고 선배들은 동아리 부원들을 소집했다. 우리가 하나 둘 모이자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A가 사정이 있기도 하고 부담감 때문에 단장을 못 할 것 같다고 하네. 원래대로 지영이가 하거나 아니면 다시 후보 받아서 뽑을게. 단장 하고 싶은 사람?”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부원들 사이에서 나는 손을 들었다.
“저 단장 하고 싶습니다.” 손을 든 사람이 나 밖에 없어 단장은 다시 내가 되었다. 고작 이간질 하나로 일이 이렇게 바뀐다니 나는 무섭기도 했지만 다시 단장이 되었으니 그런 감정은 사치라고 생각했다. 나는 곧장 집으로 가 안무를 짜고 부원들을 연습시켰다. A는 항상 뚱한 표정으로 연습 했다. 시간이 지나고 대망의 대회당일, A는 나오지 않았다. 연락조차 받지 않았다. A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부원은 아니기 때문에 A없이도 대회를 잘 끝낼 수 있었지만 뭔가 세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기분탓이라고 생각하며 대회에서 당당히 금상을 받고 학교로 돌아왔다. 그런데 나를 보는 친구들의 눈빛이 묘했다.
평소라면 웃으며 먼저 다가왔을 친구들인데 오늘은 나에게 말 한마디 걸지 않았다. 그 때 A가 잠깐 보자며 뒤뜰로 나오라고 했다. 적막 속에 우리는 뒤뜰에 도착했고 A의 말을 듣자마자 충격을 먹었다. “너 때문에 나 퇴출당했어.” 분명 개인사정 때문에 나갔다고 했는데 대뜸 이런 말을 들으니 너무 혼란스러웠다. “그게 무슨 소리야?” A는 눈물을 흘리며 답 했다. “내가 했던 것처럼 네가 그래서 나 퇴출당했다고. 이제 나 치어리딩 못 해.” A의 눈물을 보자 나는 죄책감에 휩싸이며 눈앞이 하얘졌다. 그리고 나 자신 스스로에게 너무 실망했다.
아무리 A가 그런 짓을 했어도 나는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나는 왜 A가 어떤 기분을 느끼고 어떤 대우를 받게 될지 생각하지 못 했을까. 나는 멍한 상태로 일단 A에게 사과했다. “정말 미안해. 일이 그렇게 될 줄 몰랐어.” A는 자신이 생각한 반응이 아니었는지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A는 더 크게 울며 사과했다. “나도 미안해. 다 내 열등감 때문이야. 네가 단장하는 게 너무 미웠었어. 그런데 내가 해보니까 쉽지 않더라. 진짜 너무 힘들었어.” A는 마음속의 모든 말을 폭포처럼 쏟아냈고 A의 말에 나도 눈물을 흘리며 마음속의 모든 말을 말 했다. 계속해서 말을 쏟아내던 우리는 잠시 서로를 보다가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 동안의 찝찝하고 힘들었던 기분이 다 날아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우리는 손을 잡고 반으로 갔다. 친구들은 우리의 모습을 보고 당황한 듯싶었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였다.
이 날 이후 비록 동아리에서 다시 A를 볼 순 없었지만 우리는 가장 의지하는 친구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