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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병섭 Jul 04. 2023

목표가 없는 무지한 상황 속에서 방황하며 삶을 사는

윤동주. 바람이 불어.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꾸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      

강물이 자꾸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





목표가 없는 무지한 상황 속에서 방황하며 삶을 사는

내 장례식에 찾아온 이들에게 바치고 싶은 시는 윤동주의 ‘바람이 불어’라는 시다. 다른 이유는 없다. 내가 바로 이 시에 끌렸고 이 시를 내 나름의 해석으로 내 삶과 밀접한 관계가 많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른 시들을 봐도 이만큼의 감정은 안들 듯하다.

일단 이 시 속의 말하는 이와 시인은 어떤 사람들일지, 언제? 어디서? 그리고 어떤 상황 속에서 이 시 속의 상황에 놓여 있으며 시인은 왜 이런 시를 썼을까 대해 적어내려 보려고 한다. 해석의 차이는 분명할 것이다. 이 시속의 말하는 이는 목표가 없는 무지한 상황 속에서 방황하며 삶을 사는 것 같다. 자신의 무지한 상황을 알고 있음에도 정처가 없는 방황만을 하는 그런 사람. 그렇다면 시인은? 어떠한 상황이 흘러가고 변해감에도 영락없이 시간을 보내며 마땅한 해결방안을 내놓지 못하는 사람과 같다. 말하는 이와 시인의 큰 차이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 시인과 말하는 이는 이 시에서 동일시되고 있는 상황 같았다.

그렇다면 시인은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 이 시 속의 상황에 놓여 있는가? 흠. 언제라고 할 것은 없다. 이것은 현재 자신의 상황에서 과거의 회상을 끝내고 정작 달라진 것이 없는 자신의 현재 상황을 직시하고 있지만 결국 달라짐이 없는 상황에 있는 것이다. 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내 생각이다. 그 근거로는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그리고 끝에 ‘바람이 자꾸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 부터 시의 끝까지 회상의 시작과 끝을 뜻하는 말들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 상황을 어딘가로 표현해야 한다면, 그것은 아마 성찰의 시간 속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끝끝내 시인은 무슨 생각으로 이 시를 썼는가에 대해 생각해보면 결국 위의 말의 반복이다. 과거의 괴로움과 후회에도 자신은 결국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 그에 대한 사람들의 해석을 듣고 싶은 것일수도 있고 교훈을 주기 위해서 라는 이유들을 근거로 이 시를 쓴 것 같다.위에는 지극히 개인적인 내 관점의 시의 해석이었다.     


뭔가 자기 후회?

 이제는 내가 이 시를 보고 깊은 감명을 느꼈던 명대사들을 몇 개 짚고 그에 대한 이유와 해석을 써내려 보겠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주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 이것들인데 차례대로 쭉 내려 해석해보자면 자신이 괴로워할 만한 일들이 있었는가? 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자신 개인에 대한 고민(사랑), 사회적인 그 상황에 대한 고민이 없다고 한 것들에 대해 뭔가 무슨 뜻이지 싶었다만, 이것을 반어법으로 해석하니 괴로워할 만한 일들이 있었고 그것을 회상하는데 결국 자신의 발은 반석 위에 섰고 그 상황에서 바람은 계속 불고 있던 것이다. 그니까 여기서 바람은 시간이고 자신의 발은 자신의 위치와 행동에 관련되는데, 시간은 지나가고 세월은 흐르는데 자신은 반석 위에서 가만히 있었다..라는 뭔가 자기 후회?를 가진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좀 있다.

 정리해보면 자신의 괴로움에 의문을 가지며 여러 고민을 가졌음에도 다른 무엇들은 계속 흘러가는데 정작 자기 자신은 가만히 있는 모습이 그려져 그에 대한 심정을 써내렸다는 기분이 묘하게 들어서 난 저 3개의 대사들에 굉장히 끌렸던 것 같다.


후회의 제자리걸음

그렇다면 이제 내 얘기를 해볼 시간이다. 위의 ‘바람이 불어’라는 시와 비슷한 경험을 겪은 적이 있는가? 겪거나 혹은 본 적도 있는가.. 인데, 나는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이건 다른 사람이 함부로 알 수 있는 것들은 아닌 것 같고 경험적으로 말을 해보자면 내 시험 기간의 나와 굉장히 유사한 상황과 모습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좀 든다. 난 1번이라 늘 시험을 보게 되면 창가 자리의 맨 앞에 앉아 있게 된다. 앞에 아무도 없어 뭔가 외롭고 쓸쓸하다. 창문 밖의 바람 소리를 들으며 뭔가 알 수 없는 감정과 곧 끝난다! 라는 후련함을 미리 느낀다. 여기서 뭔가 알 수 없는 감정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후회다. 후회를 인정하지 않고 회피하려던 내 모습을 내가 느끼고 있던 것이다. 난 시험의 준비과정에서 매번 큰 후회를 한다. 시간은 분명 많았고 조금씩 할 여유도 있었는데 왜 시험을 보기 1주일 전부터 공부를 할까? 그로 인한 몸의 고생으로 더 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난 다신 이러지 않겠다고 다짐을 한다. 허나 그 다음 시험, 또 다음 시험에도 난 달라진 게 없다. 또 똑같은 이유로 후회한다. 이젠 아무렇지도 않을 지경에 다다라 내 후회(괴로움)에 이유를 잘 모르겠다. 어차피, 또 이렇게 반복될텐데. 후회한다고 달라지나? 싶은 속 마음이 크다. 남들이 말하는 벼락치기를 후회해놓고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난.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심정은 그렇게 복잡하지도 않은 묘한 기분을 느낀다. 남들은 오른 성적에 만족감이 막 치솟는데, 난 무심하게 시간부터 확인하고 휴대폰 알림이나 확인한다. 남들은 등급이 올라가는데, 난 저번 등급과 같다. 난 후회의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이렇게 난 이 시를 해석해보며 나의 삶과 비슷하다는 감정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 했는데, 난 그 사실을 몰랐어”

 이 시를 읽으며 떠올린 영상이 있다. 네모바지 스폰지밥의 짧은 유머 영상 중 하나이다. https://youtu.be/tMayAhZw7WI 이 영상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이 시와 비슷하게 자신의 실수에 대한 후회의 노래이다. 가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 했는데, 난 그 사실을 몰랐어”, “이제와서 후회한들 뭐하리, 난 이미 바보가 되버린걸” 이 두 가사가 뇌리에 스치듯 지나갔다. 그 즉슨 뒤늦은 후회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 같다. 인간은 이 영상을 보면서도 인간은 실수를 반복하고 후회 또한 반복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게 후회해도 난 결국 같은 후회를 하는 멍청이니까. 그럴지언정, 딱히 나 자신을 미워하진 않는다

이 시의 내용은 우리 사회에 어떤 특정 문제와 연결된 모습은 없다. 그냥 살면서 모두가 사회생활 속이나 교우관계, 돈, 육아 등등 살아가며 아무 때나 느낄 수 있는 그런 후회들과 연관은 있을 듯 하다. 우리가 후회하는 동안, 그 누구도 우리를 기다려주고 이해해주지 않는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대로 흘려보낼 줄 알아야 하는 모습을 이 사회에서 지녀야 할 것 같다.      


내가 그러지 않았다면, 내가 조금 더 유능했다면..?

이 기나긴 글을 전해다 받을 선생님과 2093년 후 죽게 될 나의 인생에 스쳐 지나간 모든 이들과 죽은 내 장례식에 찾아온 이들에게 이 기나긴 글을 쓴 목적을 말해보고자 한다.

 내가 죽거든, 내가 후회없이 이 세상을 떠나진 않았을 것이다. 그 어떤 사람도 후회없는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기억하지 못할 뿐. 세상 누구에게나 죽음의 문턱에서 과거의 회상  속 내가 조금 더 건강했다면, 내가 그러지 않았다면, 내가 조금 더 유능했다면 등 아쉬움을 가슴속에 묻고 눈을 감은 이들이 대다수일 것이다. 그런 선택들 하나하나로 자신의 재정, 가정, 인생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나 또한 아쉬움이 있고 후회하며 가슴속에 묻고 잊혀진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을 기억하는 그 순간에도 난 달라지지 않음과 후회를 해놓고 또 기회가 찾아오면 또 똑같이 후회하는 그런 바보 같은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그니까 난 적어도 세상 사람 모두가 후회라는 감정을 경험해보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날 알고 날 지켜봐 온 그런 사람들이 적어도의 후회는 있기를 바란다. 허나 반복은 멍청한 짓임을 알게 해주는, 깨닫게 해주는, 내 인생을 지켜보며 영감 하나 정도는 가져갈 수 있길.. 난 죽어서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지만 이 글로나마 전해주고 싶다. 누구에게나 가슴속에 무거운 짐 하나씩은 달고 사는 것이 인생이다. 그것에 있어 조금의 힘과 계기가 될 수 있길 바라며 난 이 시를 해석하고 내 인생에 빗대어 이렇게 긴 글들을 써내린다.

 이 글들 또한 시행착오라는 것, 내 시행착오의 끝이 어땠는지에 대해 사람들이 곰곰이 생각해 볼 기회가 되길 바라며 자신의 앞날에 영향을 준 명단에 조그마하게라도 내 이름이 적히길.. 이게 내 죽기 전 마지막 선물이길 바란다. 나로 인해 누군가 교훈을 얻어가길..      


윤동주 시인의 생각, 상황 / 이 시를 읽으며 떠올린 음식?

시속의 나, 혹은 시안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음식 한 가지를 소개하고 이 긴 글을 마무리하겠다. 이 시는 일제 강점기의 부당한 시대 현실 앞에서 방관자로 남은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는 시인의 마음이 드러나 있다. 때문에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는 강한 부정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시대를 아프게 슬퍼했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바람과 강물이 방향성을 가지고 움직이는 대상으로 제시되는 것과 대조적으로 반석과 언덕이 목표 없이 정체된 삶을 나타내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 시에서 ‘바람’은 화자가 괴로움의 이유를 찾는 계기로 등장한다. 윤동주의 시에는 조국을 잃은 민족의 설움과 현실을 이겨 내고자 하는 염원이 담겨져 있다.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 자아 성찰과 부끄러움의 미학이다. 나는 이 시를 읽고 윤동주 시인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나름대로의 해석과 윤동주 시인의 뜻을 알아보았다. 이 시와 맞다고 생각하는 음식은 급식과 같다. 이유를 말해보자면 나는 반찬 투정이 없지 않아 있는 편이라, 싫어하는 채소가 몸에 좋다는 것을 알고도 먹지 않고 버린다. 나는 즉 가해와 방관을 동시에 하고 있고 남들의 다 먹고 깨끗한 급식판을 보면 내 급식판에 남겨져 있는 음식의 부끄러움을 느끼고 욱여넣곤 한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잔반이 있다면 식사를 끝내지 않고 끝까지 욱여넣고 삼키는 진짜 상남자다. 이렇게 이 긴 글을 끝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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