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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깐 KKan May 17. 2016

미련으로 완성되는 아름다운 시절

이순원, <삿포로의 여인> (2016)



꾸준히 일상을 공유한다는 전제 하에, 한 두 해의 시간은 오래 지나도 애틋한 추억을 쌓기에 가장 알맞은 기간이다. 한 철 내지 한 두 계절은 한 사람과의 관계를 맺기 시작하는 단계에 가깝다. 적어도 한 계절을 두 번씩 겪을 때면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비로소 알아가게 되고, 함께하는 일상이 몸에 배어든다. 비단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뿐 아니라, 생활하는 장소에 대해서도 그렇다. 각자의 삶에 분주한 이웃에서부터 느리게 모습을 바꾸는 식물, 바람, 햇빛까지 이 정도 시간이 흐르기 전엔 여행하듯 낯설다. 두 해 정도는 되어야, '시절'이라는 단어로 불리며 추억하게 되는 것 같다.



한 시절의 제목은 그 시기에 밀접한 관계를 맺은 사람의 이름이 되곤 한다. 학비를 벌기 위해 이모부의 구판장이 있는 대관령에 머물렀던 주호에게도, 그 2년 여의 시간은 열여덟의 소녀 연희로 가득하다. 일본으로 어머니가 떠난 후, 국가대표까지 올랐지만 몰락해버린 스키선수 아버지를 따라 대관령 온 연희는 일본에서 태어난 오빠와 할머니 댁에서 살게 된다. 돈을 벌어야 했던 연희는 학교 대신 구판장 맞은편의 수선집에서 일했고, 연희의 외로움을 남의 일로 여기지 못한 주호는 그녀에게 이런저런 도움을 건넸다. 대관령에 내려온 목적을 분명히 품고 있었던 주호는 자신에게 연희가 큰 의미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연희를 잊고 지낸 21년이 흐르고, 연희의 친오빠가 연락해 오고 나서야 그 시절이 온통 연희였음을 알게 된다. 



그 시절에는 알 수 없었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훨씬 특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추억의 보정일 수도 있다.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을 향한 미련 때문에 가능한 한 아름답게 기억하려는 본능일지도 모른다. 그러함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겠지만, 달라진 환경에서는 같은 마음도 다르게 보인다는 점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지금은 지나온 덕에 영향력을 잃은 일들이 그 당시엔 인생을 뒤흔들 것처럼 중요한 일이었을 수 있다. 그때 가려지고 외면당한 감정들은, 이제야 미처 보살핌 받지 못했음을 깨닫게 된다. 아름다운 것들은 왜 지나고 나서야 보이는지, 그래서 미련을 품고 마는지 흔히들 묻는다. 어쩌면 흐르는 시간 속에 사는 인간에게 감정의 뒤늦은 발견과 따라오는 미련은 필연적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운 추억들은 그렇게 쌓이는 것인지도.




주호는 그때 인생에서 확실하게 안 것이 하나 있었다. 나이는 그냥 먹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학교 공부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삶의 어떤 내공 같은 게 이모부에게 있었다. 그게 조금은 배운 아버지와 혼자 맨바닥을 다지며 살아온 이모부의 차이였다. 함께 얘기를 하다 보면 배움과 학식조차 굴욕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52쪽)


"이봐 지식인. 아무것도 안 하고 계속 밥만 먹으면 그건 또 무슨 맛이겠어. 즐기며 노는 것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일을 의미 있게 해주고, 일은 또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고, 그 시간을 기쁘게 기다리게 하고 설레게 하지." (161쪽)


"멀리 대관령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바다 너머에 있는 세상을 생각하게 하는데, 오늘 처음 가까이 가본 바다는 그냥 눈앞의 바다만 생각하게 해요. 그래서 먼 바다와 가까운 바다가 다르구나 생각했어요." (175~176쪽)


"이제 이거 날 줬으니 네 거 아니고 내 거 맞지?"
"예."
"그래. 이제 이거 내 거야. 내 건데 나는 너처럼 무얼 잘 보관하지 못하고 네 오빠처럼 잘 잃어버려. 그러니까 이거 네가 내 대신 잘 보관해줘. 네가 보관하고 있어도 내 거니까 앞으로 절대 누구에게 주면 안 돼. 언젠가 내가 달라고 할 때까지 네가 지금처럼 보관하고 있는 거야. 알았지?" (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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