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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깐 KKan Jun 08. 2016

피하려면 나무가 되는 수밖에

한강, <채식주의자> (2007)


산들바람이 불면 이파리를 살랑이고 햇빛이 내리쬐면 발치에 쉼터를 마련하는 나무. 못 이겨 부러지고 말기도 하지만, 대다수는 살인적인 강풍도 기어코 견뎌내 강인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길게는 수 천년까지 한 자리에 서서 세상만사를 다 겪었으니, 그들이 성인이나 현자의 인상을 풍기는 것도 어느 정도는 그럴싸하다. 아주 운이 좋아야 일 백 년을, 그것도 쓰러지기를 반복하며 버티는 인간의 눈에 과묵한 나무는 평온함 그 자체로 비친다. 벌목지에서 쓰러지는 녀석들은 예외지만, 숲은 당연하고 심지어 매연 속 가로수마저도, 보고 있자면 조금 전까지 씩씩 대던 마음도 차분해진다.



성인이나 현자처럼, 화를 내고 남을 해하는 여느 인간과는 거리가 먼 나무. 때때로 나무는 인간의 악한 면들을 모두 거둔 개체로 느껴진다. 그것도 물과 햇빛으로 숨을 들이고 내쉬는 생명체로써 말이다. 소설 <채식주의자>의 영혜는 피범벅의 꿈을 꾼 후 돌연 육식을 중단한다. 아버지의 폭력적인 강요에도, 다른 가족들의 간청에도 고집을 꺾지 않으며 채식을 고집한다. 브래지어도 수면도, 남편과의 잠자리도 완강히 밀어낸다. 타인의 시선이나 사회적 관계는 물론, 본능마저 거부한 것이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자연스러운 몸으로 다른 누군가를 해치지 않고 살아가는 나무들을 영혜는 동경한다.



나무가 되려는 영혜의 배경에는 어린 시절의 끔찍한 기억이 있다. 자신을 문 개가 자신의 아버지의 오토바이에 매달려 지독하게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도한 것. 개에 물린 상처보다 끔찍하게 죽어가는 개의 모습이, 또 그 일을 보란 듯이 벌인 부정으로 포장된 아버지의 잔인함이 영혜에게는 훨씬 더 큰 괴로움이었다. 지워지지 않은 그녀의 상처는 오랜 시간이 지나 살육의 거부로, 급기야 인간의 삶에 대한 거부로 발현한다. 인간으로 살기를 아직 포기하지 않은 독자로서, 모든 인간이 타자를 살해하고, '남의 살'을 먹는 데 미쳐 있는 건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어지기도 하지만, 시도하기도 전에 그만두게 된다. 이 모든 인간의 죄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고, 동물의 몸을 가진 인간은 욕망 없이 살 수 없으니 말이다.



인간의 욕망은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 되어줌에 분명하지만, 한편으로 잔인함을 드러내게 하는 근원이기도 하다. 욕망을 크게 품으면 품을수록 누군가에게 더 큰 상처를 남기곤 한다. 육식을 거부하는 영혜에게 그녀의 아버지는 또 한 번 폭력을 행사했고, 한 자리에 있던 영혜의 남편과 형부와 언니의 입장에서 이 장면은 각자의 해석으로 읽힌다. 세 사람은 영혜가 이 모두를 거부하고 인간의 몸을 버리려 한 순간에도, 이들은 각자의 욕망에 눈멀어 있었다. 그렇다고 그녀의 아버지를 포함한 이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욕망을 배제한 삶은 영혜가 택한 식물의 생과 다를 게 없으니까. 인간이 무언가를 탐하고 바람으로써 타인이, 심지어는 자신마저 상처받게 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우리는 그만 두기가 어렵다. 나무가 되는 것을 택하지 않을 거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주의하는 것, 그뿐이지 않을까. 그래서 슬프다.





봄이 올 때까지 아내는 변하지 않았다. 매일 아침 풀만 먹게 되긴 했지만 나는 더이상 불평하지 않았다. 한 사람이 철두철미하게 변하면 다른 한 사람은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23쪽)


그제야 그는 그녀의 표정이 마치 수도승처럼 담담하다는 것을 알았다. 지나치게 담담해, 대체 얼마나 지독한 것들이 삭혀지거나 앙금으로 가라앉고 난 뒤의 표면인가, 하는 두려움 마저 느끼게 하는 시선이었다. (93쪽)


그녀는 계속해서 살아갔다. 등뒤에 끈질긴 추문을 매단 채 가게를 꾸려나갔다. 시간은 가혹할 만큼 공정한 물결이어서, 인내로만 단단히 뭉쳐진 그녀의 삶도 함께 떠밀고 하류로 나아갔다. (1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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