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浪漫) 다시 읽기― 변하는 것만이 낭만

by 까나리

*이 글은 2023년 6월 내가 직접 기획한 전시 <영원, 낭만, 꽃> 서문의 내용을 수정하고 보충한 것이다.


모든 것이 흘러간다면 영원함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사람은 무엇이 영원하길 바라고, 왜 영원을 바랄까. 어떤 것도 영원할 수 없다면 어떤 것을 손에 실제로 쥘 수 있을까. 인류는 끊임없이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 노력해왔고, 그 시도들이 모여 역사를 만들었다. 어떤 시대는 종교에서 답을 찾으려 했고, 또 어떤 시대는 과학에서 답을 찾았고, 또 다른 시대를 살던 사람들은 덧없이 시간이 흘러가 버리고 인간은 종국에는 죽음을 맞이한다는 허무주의에 빠지기도 했다. 인간 이후의 삶이 있다고 믿는 종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흘러가는 인간의 시간 바깥에 영원함을 둘 것이냐, 이 영원함을 인간의 시간 안쪽으로 끌어들일 것이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역사는 후자를 선택했고, 이 선택이 중세에서 근현대로의 흐름을 만들었다.


다 변한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누군가와의 낭만적인 사랑이 영원하길 꿈꿨나요? 아쉽지만 그건 과학적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사랑의 형태가 바뀌면서 유지될 수는 있겠지요. 일자리를 처음 가질 때의 결연함과 초심이 영원하길 바라나요? 천만에요, 헬조선에서 갈리면서 우리는 점심시간과 퇴근시간을 기다리고 인류애를 잃을 뿐입니다(ㅋㅋ). 그렇지만 직장에서 살아남는 형태를 바꾸어가며 그 자리에 남을 수는 있겠지. 미술에선 이런 걸 도상(icon)이라고 한다. 어떤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를 읽는 걸 도상학이라고 한다. 모든 도상은 의미를 계속해서 바꿔가며 살아남는다. 원래의 그 대상물, 이미지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다만 의미가 변할 뿐이다.


유명한 보티첼리의 <수태고지>를 보자. 여기서 대천사 가브리엘이 손에 백합을 쥐고 성모마리아를 축복하고 있다. 백합은 순결을 나타내는 성모마리아의 표식으로, 잠자리 없이 마리아가 예수그리스도를 잉태했음을 나타낸다. 수태고지의 순간을 나타내는 작품들에는 대부분 백합이 등장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가 그린 <수태고지>에서도 마찬가지로 가브리엘이 백합을 든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기독교 종교화에서 도상은 강력한 존재이고, 백합은 기독교를 바탕으로 서양권에서 이 도상학적 의미가 워낙 컸기 때문에 오랫동안 ‘순결’에 대한 강력한 모티프가 되었다. 그러나 백합 역시 요즘은 여성간의 동성애를 모티브로 하는 서브컬쳐 장르를 의미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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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 산드로 보티첼리, 수태고지, 1489-90, 우피치미술관 (오) 레오나르도 다빈치,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 수태고지, 1472, 우피치미술관



아무튼, 백합 뿐만이 아니라 낭만의 정의도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낭만(浪漫)은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꿈과 감정에 충실한 태도’라고 국어사전에서 정의하고 있다. 사실 낭만은 물결 랑(浪)과 질펀할 만(漫)이 합쳐진 단어다. 물결따라 질펀하게… 실제로 낭만이라는 단어는 조선시대까지는 정처 없이 떠돈다거나 방탕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낭만이 국어사전 속 의미로 사용된 것은 1910년 이후의 일이다. 반면, 서양에서 낭만주의(romanticism)는 계몽주의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다. 계몽주의는 인류의 역사가 선적으로 흐르고 세계와 삶이 물질적‧정신적으로 무한히 진보를 이룬다고 확신했다. 이게 마음에 안 들었던 사람들은 또 귀신같이 눈을 돌려서, 다시 개인의 내면에 집중하는 감성적인 인식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낭만의 역사는 하나의 가치가 영원히 옳은 것은 아님을 증명한다. 사람도 그렇지만, 꽃도 폈다가 진다. 사람도 꽃도 필멸의 존재다. 반드시 사라진다는 것은 ‘불멸(everlasting)’이나 ‘영원(absolute)’과는 극점에 있다는 얘기다. 내가 얘기하려는 낭만은 필멸과 영원함,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 내가 ‘낭만’을 탐색하는 것은 거대한 하나의 관념으로서의 총체성에서, 개별적인 삶의 구체성과 역동성으로 눈을 돌려보려는 시도다. 다르게 말하면 삶이 계속해서 변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 변화에 매몰되지는 않고자 애쓰는 상태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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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승, Rose is a rose is a rose 시리즈, 2016, ⓒ갤러리바톤


정희승의 <Rose is a rose is a rose(장미는 장미가 장미인 것)> 시리즈를 보자. 제목은 거트루드 스타인이 1913년에 쓴 시 <Sacred Emily>에서 따온 것이다. 정희승은 너무 일찍 사춘기가 와서 괴로워하던 딸 아이를 보며 이 작업을 생각해냈다고 했다. 성장통, 불안하고 보기에 위태롭지만 누군가를 해치지는 않는 상태. 사물을 낯설게 보고 다르게 감각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시간이지만, 결국은 그 시간을 잘 헤쳐나가야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마침내 ‘나’를 통합된 전체로 인식하기가 열리는 순간은 그 미지의 상태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달려있다. 마치 정희승이 각기 다른 날에 찍은 각기 다른 장미들 같은 미지의 순간들 말이다. 어떤 날은 시들고, 어떤 날은 덜 피었고, 어떤 날은 보기 좋게 이파리를 펼친 개별적인 장미의 순간들처럼. 거트루드 스타인의 시에서 실제로 “Rose”는 강박적일 정도로 반복적으로 발화되고, 이미 ‘장미’라고 너무 많이 불린 것, 그래서 그 의미가 소진되어버려 텅 비어버린 것을 말한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도 마찬가지다.


“지난 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텅빈 이름뿐”
“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
(Yesterday’s rose endures in its name; we hold empty names.)


그러나 의미가 소진되어 텅 비어버린 것은 다른 한 편 우리에게 숨 쉴 구멍을 주는 것과 같지는 않은가. 그 공간은 우리에게 다른 상상을 할 여지를 주지는 않는가. 내가 생각한 낭만은 이런 것에 가깝다.


인간의 삶을 닮으려는 예술이 난해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삶과 사회를 하나의 명료한 관념으로 보지 않고,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개개인의 삶을 포착하려는 불가능한 시도를 감행했기 때문이다. 현재만이 영원하다. 오지 않은 미래에 현재를 저당 잡히지 않고 흘러가는 순간을 어떻게 의미화할 수 있을까. 낭만은 안정과 견고함의 지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변화를 견디는 불안함 속에 있는 것은 아닐까.





참조. <의미의 불가능성에 대한 세 개의 소품들>, 정희승, https://www.chungheeseung.kr/home/rose-is-a-rose-is-a-r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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