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과 전쟁으로 점철된 러시아 이미지는 잠시 넣어두시라
러시아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푸틴, 전쟁, 침공, 보드카, 불곰?
사실 러시아는 오래 전부터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대가인 카지미르 말레비치(1879~1953, 말레비치는 당시 소비에트 연방, 즉 러시아령이었던 현 우크라이나의 키이우에서 태어났다)나 블라디미르 타틀린(1885~1953, 타틀린 역시 현 우크라이나의 하르키우에서 태어났다. 작금의 상황을 보면 말레비치나 타틀린이나 무덤에서 개탄을 금치 못할 것), 알렉산드르 로드첸코(1981~1956), 또 나중에 프랑스로 국적을 변경하긴 했으나 러시아 태생의 유명한 구성주의자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와 같은 수많은 예술가들을 배출한 나라다. (딴 얘기이긴 하지만, 바실리 칸딘스키의 작품은 실물로 보아야 색채표현의 감동이 훨씬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곳으로는 프랑스 파리의 퐁피두 센터가 있으니, 갈 일이 있으신 분들은 꼭 칸딘스키의 작품을 한번쯤은 보시기를 권한다.) 그만큼 서양미술사를 다룰 때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러시아 미술사이기도 하다.
여기까지 왜 장황하게 러시아 미술에 대해 말했냐하면, 이번 글에서 다룰 아티스트 그룹이 러시아 출신의 작가 콜렉티브이기 때문이다. AES+F라고 하면 이 이름은 무슨 뜻이냐고 묻는 사람이 가장 많았던 것 같다. AES+F는 간단히 말하자면 작가 네 명의 성 앞머리를 따서 만든 그룹의 이름이다. 타티아나 아르자마소바(Tatiana Arzamasova), 레프 예브조비치(Lev Evzovich), 예브게니 스비야스키(Evgeny Svyatsky), 그리고 블라디미르 프리드케스(Vladimir Fridkes)가 마지막으로 합류하면서 최종적으로 그룹의 이름이 확정됐다. (부를 때는 보통 "에이이에스 플러스 에프"라고 부른다)
아마 국내에서는 AES+F의 작품들이 눈에 익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AES+F가 아이웨어 브랜드 젠틀몬스터와 협업했기 때문이다.
현재도 젠몬과 AES+F 콜라보레이션의 결과물은 젠틀몬스터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AES+F 작품이 가지는 특유의 미래적이면서도 경계를 오가는듯한 작품이 젠틀몬스터의 브랜드 이미지와도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https://www.gentlemonster.com/legacy/story/ko/nano-collection.html 참조)
날개가 달린 머리 두개인 동물, 얼굴은 퍼그 다리는 문어에 날개가 달린 생명체, 남자 같기도 여자 같기도 한 사람들.. 이런 이미지들은 무엇을 의미하고, 또 AES+F는 어디에서 영감을 받아서 이런 작품을 만들었을까?
위의 <The Circle of Life>에서도 나왔던 이미지들은 이 <Inverso Mundus> 시리즈에서도 반복해서 보인다. 드레스를 입은 여성들은 이케아처럼 대량생산 된 듯한 가구에 상의를 탈의한 채로 거꾸로 매달린 남성들을 고문하고, 10대는 80대 노인과 킥복싱 대결에서 이기고, 정장을 빼입은 부자들은 노숙인들에게 기부 받고, 정육점 주인은 돼지에게 도살 당하고, 사람들은 키메라들을 반려동물처럼 대하고 있다. 한 눈에 우리가 생각해왔던 사회적 통념을 뒤집은 이미지들인 것을 알 수 있는데, 심지어 이들이 위치한 공간 역시 이케아를 본 뜬 것 같은 MDF 수납장이다.
이미 작가 홈페이지에 친절하게 설명이 되어있지만 이 <Inverso Mundus> 시리즈에 대해 잠깐 설명하자면,
이 시리즈는 16세기 판화 중 <The World Upside Down(뒤집힌 세계)>를 보고 영감을 얻어 제작한 것들이다. (아래 이미지 참조)
Inverso는 이탈리아어로 reverse, 즉 '뒤집힘'을 의미하는 동시에 고대 이태리어로 poetry(시)를 의미한다. Mundus는 라틴어로 world, 세계를 뜻한다. 실제로 이 판화 이미지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41번에서는 키메라 같은 동물들이 하늘 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고, 17번에서는 나귀가 주인을 부리고 있다. 다시 말해 AES+F가 사진으로 만든 작품들은 이런 웃기면서도 비극적인 이미지들을 아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들이다.
나는 2021년 국내 미술관에서는 최초로 AES+F의 단독 기획전을 개최한 적이 있고, 그 때의 경험을 살려 써보자면 이 시리즈를 보고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이에요?"라고 묻는 관람객들이 많았다. (여기서부터는 도록에도 실려있지 않은 큐레이터의 실무 얘기라고 봐주시면 감사하겠다. 사실 도록에 이미 실린 글은 그걸 보셔도 충분할 일이고.. 여기서는 도록에선 못다한 말들을 하고 싶다) 그 뿐이겠냐. 이거 전시했다가 우리 꼴페미라고 화형 당하는 거 아냐..? 하면서 작가들이 보내온 오브제 사진들 중 작품을 셀렉하다가 최대한 순한 맛으로 고른 것도 있다. 어떤 거였냐면...
이런 거였다. 마음 같아선 이런 걸 하고 싶었지만 공립미술관인 관계로 가족단위 관람객이 많이 온다는 점, 그리고 꼴페미 미술관으로 낙인 찍히고 싶지는(?) 않다는 점 등을 이유로 최대한 순한 맛의 케이지를 오브제로 빌려와서 전시했다. 나중엔 그러길 잘 했다고 생각했다. 후술할 테지만, 5전시장을 가득 채워 옥타곤 형태로 전시된 <투란도트2030> 영상을 보고 '애기들도 오는데 이런 걸 전시하면 어떻게 하냐, 우리 애가 발작했다'라고 실제로 민원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공립미술관의 공적 입장과는 별개로, 큐레이터와 한 개인인 나로서는 다소 아쉽기는 했다. 이왕 국내 최초 미술관 전시로 할 거라면 좀 더 보기 어려운 작품들이 실제로 오면 어떨까, 하고 내심 바라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Inverso Mundus 시리즈는 말 그대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한번쯤은 거꾸로 뒤집어서 생각해보자는 뜻이다. 라틴어와 이태리어를 섞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AES+F의 가장 큰 특징은 고전에서 아이디어를 차용한다는 점이다. 반면에 이것을 보여주는 시각적인 방식은 충격적인 동시에 미학적으로도 굉장히 세련되었기 때문에 동시대 미술에서 독보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나는 운송예산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작가들에게 직접 원본 파일을 디지털로 받고, 몇번의 샘플링 과정을 거쳐서 국내에서 재제작 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게 더 저렴했기 때문이다. 다이아몬드 컷팅으로 완성된 디아섹 실물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작품의 완성도가 어마무시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사진 시리즈 12점은 독일의 베를린에 소장처가 있었는데, 나는 당시에 모스크바에서도 조각 작품을 빌려와야 했기 때문에 운송 예산이 이 두군데 모두를 거칠 여력이 되지를 않았다. 해외 작품 운송의 경우 우리나라에서 내가 지정하는(입찰하는) 작품운송사가 있고, 이 운송사가 해외 파트너사를 컨택해 견적을 받고 일을 하는 식이다. 당연하지만 국가가 늘어나면 그 국가별 파트너사가 별도로 있다. 각 국가별로 가는 항공료에, 국가별로 그 소장처까지 가는 비용에, 거기서 직원들이 소장처까지 가서 몇명이 달라붙어 포장을 하고, 나무로 된 크레이트를 짜고, 다시 이걸 카고 비행기에 실어서 보내고, 한국으로 오기까지 비용과 절차가 만만치가 않다. 게다가 그 때는 코로나 시국이었다. 카고 플라잇의 수요 자체가 급격히 줄어들었고 그에 따라 운송비용은 폭증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논의 끝에 국내의 유명한 사진 제작 업체에서 작품을 재제작 하기로 결정했고 작가들에게도 이런 시도는 처음이라 도전에 가까웠다.
일반 관람객 입장에서는 '사진 프린트하는 게 왜?' 싶을 수 있지만, 컬러감과 해상도에 민감한 사진작품의 경우에는 프린트하는 인쇄기와 잉크의 상태에 따라 작품의 질이 천차만별로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게다가 이 경우 작가들이 디아섹(diasec)을 원했기 때문에 이걸 전문적으로 제작할 수 있는 업체를 찾아야 했다. 작품의 크기는 세로가 약 2미터에 달하는 커다란 작품이었고, 이걸 1차로 프린트 한 후에 그 위에 디아섹을 얹어 후가공 하는 형태다. 게다가 프레임이 따로 없이 디아섹만 설치하길 원했기 때문에 가장자리 컷팅은 다이아몬드 컷팅이라고 하는, 후처리가 2중으로 들어가는 작업이었다. 작업이 얹어지면 얹어질수록 컬러감은 달라지기가 쉽고 그만큼 예민한 작업이 된다. 특히 마젠타와 블랙의 경우에는 컬러감의 차이가 더 심하다. 작품을 실물로 보는 것이 도판으로 보는 것과는 다르다고 말하는 이유다. 뉴욕에 위치한 스튜디오 디렉터가 작품을 프린트한 샘플을 우편으로 보내주었고, 이것과 몇번의 대조를 거치고 업체와도 상의 끝에 작품을 완성했다. 물론 이렇게 국내에서 재제작 한 작품은 전시 후에 반드시 원본 디지털 파일과 함께 파기해야만 한다. 사진의 경우 복제가 너무 쉽기 때문이다. (이 경우 작가와 계약을 맺을 때 통상적으로 계약서에 이런 사항이 모두 표기된다)
다 쓰자니 너무 길어져서, 2부로 나누어 쓰기로 한다.
※ 본 글은 필자가 2021년 미술관에서 직접 진행한 <AES+F. Lost, Hybrid, Inverted> 전시를 큐레이팅 한 경험과 그에 쓴 글을 토대로 작성했습니다. 모든 작품사진의 저작권은 AES+F 작가에게 있음을 밝히며, 전경사진의 촬영자는 1207스튜디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