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하지 않을 낭만, 따를 수(隨)의 수행 (1)

by 까나리

어떤 단어는 너무 많이 사용되어서 이미 그 의미를 모두 소진해버린 것처럼 느껴진다. 사랑, 낭만, 순수, 혁명, 진리 같은 단어들이 그렇다. 기꺼이 나의 마음을 타인에게 내보이는 것. 어둡고 힘든 시기에도 함께하고, 손을 내밀기를 약속하는 것. 바뀌지 않을 것 같은 공고한 내 세계에도 타인의 침입을 허용하는 것. 이를테면 인구주택총조사에서 비혼동거 칸이 새로이 생겼다거나, 어떤 청년의 과로사에서 나와의 연관성을 찾고 함께 슬퍼할 수 있는 것. 사랑과 낭만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것들, 이것을 통해 이룰 수 있는 느린 혁명 같은 일은 종종 온라인 세상에서 가볍게 소진된다. 자본과 권력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거나 혹은 할 수 없다고 느껴지는 현실에서 이런 의미의 고갈은 가속화 된다.


“지난 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 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텅빈 이름 뿐(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 이 라틴어 문구는 보편타당하고 절대적인 진리란 없음을 보여준다. 의미는 끊임없이 원래의 단어에서 미끄러져 나간다. 의미는 하나에 계속해서 매달려있지 않고 바깥세상의 변화에 따라 고갈되고, 새롭게 생성되었다가, 또 소진되기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초기 낭만주의자 중 한 명인 프리드리히 슐레겔(Friedrich Schlegel, 1772~1829)은 이미 18세기에 하나의 절대적인 의미, 혹은 종결된 의미의 순수함은 낭만성과는 양립하기 어렵다는 걸 읽어냈다.(1) 낭만주의자들에 의하면 낭만적 자아 역시 끊임없는 외부세계와의 교류 속에서 자신의 동일성을 정립하고 동시에 부정하는 ‘자기부정의 연속체’다.(2) 마치 자아를 바깥에서 바람이 들어오고 나가는, 그러면서 내부에서 이 두 공기가 만나 순환하는, 구멍이 숭숭 뚫린 하나의 물체처럼 본 게 아닐까 싶다.


Franz_Gareis_Portrait_Friedrich_Schlegel.jpg 카를 빌헬름 프리드리히 폰 슐레겔(1772~1829)


그러나 낭만주의는 결국 왜 실패했을까? 하나의 명료한 단어로 삶과 사회를 정의하기를 부정했기 때문이다. 그 대신 계속해서 움직이고 살아숨쉬는 순간을 포착하려는, 언뜻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낭만주의가 이미 몇세기 전에 실패했음에도 여전히 몇몇 미술작품들에서 낭만성이 살아숨쉬는 순간들을 발견한다. 계속해서 흩어지는 자신을 그러모으고, 불완전하지만 발화를 반복하는 일을 통해 삶 속에서의 낭만을 획득하는 작업들 말이다.


(1) 프리드리히 슐레겔, 「아테나움 단상」, 2015, 홍사현 역, 그린비.

(2) 이정은, 「낭만주의의 인간적 도야 - F. Schelegel의 철학적 양가성」, 『시대와 철학』 2020 제31권 제1호, 2020, p.221.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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