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비인간, 결정된 종을 넘어―오주영의 로봇 새들
생태계가 정태적인 종들의 단순조합이 아니라 변화하는 관계의 장이라는 인식은 수행적 변환에 대한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 다시 말해, 자연을 단순히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포함한 물질의 수행성을 중시하는 것이 인간과 자연, 인간과 기계 같은 이분법적 구도의 종차별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다. 모두를 변화하는 중인 종, 즉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계속해서 그 다음의 상태로 넘어가는 중인 투과체로 새롭게 인식할 때, 생태계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하며 상호작용하는 관계의 장이 된다.(5) 이렇듯 모호하고 불분명하며, 계속해서 꿈틀대는 순간을 잡아내려는 시도는 몇백 년 전의 낭만주의처럼 또 실패로 돌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렇게 불완전하면서도 반복되는 노력은 수행성의 조건이며, 나아가서는 실패한 낭만의 대안적 실천이다.
오주영(1992~)의 작업은 기술을 이용하는 동시에 자연, 여성, 동물에 작용하는 매커니즘을 통합적으로 바라본다. 그가 인간과 비인간 주체를 바라보는 시각은 고통을 공유한다는 하나의 감각에서 출발한다. 아픈 부모님을 간병하거나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과 같이 여성의 몸은 역사적으로 오랜 시간 돌봄을 통과해왔다. 그 또한 세대를 거치면서 반복되는 일들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이 문제를 다루게 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오주영 작업의 핵심적인 지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돌봄의 주체를 인간뿐 아니라 기계와 동물, 비인간으로까지 확장시킨다는 점이다. 비인간 주체, 즉 자연과 기계도 적극적인 수행성을 지닌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비인간 존재의 능동적 힘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생태학적 함의를 가지기 때문이다. 포스트휴먼 담론은 지속적으로 인간 중심주의를 넘어서고자 해왔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인공지능, 사이보그처럼 기술의 발전에 따른 기계의 확장성이 주된 주제가 되었다. 그러나 기술적 변화에 집중하면서 생명윤리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미약해진다는 약점을 가지기도 했다. 혹은 기술의 발전이 생태계의 보존이나 생명윤리와는 반대된다는, 이분법적으로 편향된 시각이 생겨나기도 했다.
오주영은 기술연구자이자 작가로서 계속해서 기술 기반의 작업을 해왔지만, 그 중에서도 <황조롱이 드론>(도판1, 2023)은 생태학적 관점에서 봤을 때 특히 눈에 띄는 작품이다. 그가 최근 드론 택시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한 현대자동차에서 조류 충돌 및 스카이킬과 관련한 작업을 몇 가지 제안한 후 완성했다. 오주영의 전작 중에서는 ‘새의 다양성 연구소에서 새를 연구했으나, 새의 멸종으로 연구실적을 내지 못해 연구소가 폐지된’ 연구자가 주인공이 되는 게임이 있다. 그는 자신이 만든 게임 속에서 “중간에서 이것도 저것도 못하는 모습이 꼭 나 같다”고 생각하며 황조롱이 드론을 만들었다고 했다.
실제로 새 모양의 장난감은 새를 쫓는 목적으로는 가장 효율적인 기술 중 하나인데, 중요한 문제는 새 모양 드론은 1분 29초를 채 버티지 못하고 추락한다는 점이다. 기술은 특성상 시장에서 활성화되지 못하면 빠르게 사장된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벌의 날개를 모방한 드론이 대표적인 드론기술이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이 점에 착안해서 날 수 없는 새 모양의 드론 대신, 새들에게 경계심을 주어 쫓아낼 수 있도록 상위 포식자의 날개 모양을 한 로봇을 만들었다. 날갯짓을 최대한 유사하게 만들기 위해 성체 황조롱이의 날개 크기 120cm와 무게 또한 맞춘 카본로드 날개는 포식자의 흉내를 내며 새들을 안전한 곳으로 내쫓는다. 오주영은 스스로의 작업에 대해 ‘방식도, 기술도 생태학적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나름대로의 시각으로 기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는지 찾아보려고 했다’고 했다.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예술가의 경우 그 매체가 나무라고 해서 생태학적이거나, 철이라고 해서 생태학적 기준에서 벗어난다고 재단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인간 중심주의를 벗어나는 사유인 포스트휴먼 담론은 비인간을 인간과 같이 동등한 행위자의 위치에 둔다. 이 이야기 속에서는 비인간 주체도 적극적인 수행성을 가진다. 비인간 존재에게 작동하는 차별에 대한 비판은, 그 매개를 무엇으로 하고 있건 간에 확장적 사유를 전제로 할 때 비로소 인간과 비인간의 차이를 넘어서는 윤리적 감수성의 단서가 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서로를 조금씩 내어줄 때, 그 자리에서 새로운 관계가 생겨난다. 억압받는 환경에서 권력에의 저항은 고통을 공유한다는 감각에서 비롯된다. 이 매커니즘을 인지할 때, 비로소 생태 문제를 통합적으로 바라보고 이를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실천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나아가 이런 시선은 비인간 존재에 대한 확장된 관심을 공유하면서, 기술적 변화에 집중한 나머지 물질적 기반과 생명윤리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빈약해진 기존의 포스트휴먼 담론을 보완하고 확장해 나간다.
AI 영상작품인 <유조키움센터>(도판2, 3, 2023)는 황조롱이 드론과 비슷한 맥락 위에 있으면서도 또 다른 시각을 제시한다. 원래는 철새였던 쇠제비갈매기를 12개월 내내 정착해 살아가는 텃새로 만들기 위해, 황조롱이 드론을 돌봄새로 고용한다는 내용이다. 황조롱이는 천연기념물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아파트 생태계에 적응해 개체수를 늘려온 생명체인데, 이 점에 착안해 쇠제비갈매기가 알에서부터 유조가 될 때까지 황조롱이 드론이 돌봄을 제공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1차적으로 인간의 전유물이라고 여겨져 온 돌봄노동의 행위는 비인간 주체로 확장된다. 돌봄의 제공자가 인간에서 조류라는 자연 속의 비인간으로 옮겨가면서, 작품 속의 생태계는 변화하고 생성되는 윤리적 관계의 실천적 장으로 탈바꿈한다.
<유조키움센터>는 단순히 돌봄이라는, 사회적으로 낮은 등급의 가치가 부여되어 온 행위를 억압받는 생명권력으로 확장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영상 속의 돌봄새는 실제 살아있는 새가 아니라 야생성이 제거된 로봇이다. 작품 속 설정상 타 종을 돌보기 위해 만들어진 초기의 로봇 새는 야생성이 채 제거되지 못해 어린 쇠제비갈매기들을 몇 마리 죽여버리는 사고가 생긴다. 이런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황조롱이 돌봄로봇에는 몇 번의 업데이트 패치가 진행된다. 더불어 영상 속 센터는 이런 쇠제비갈매기의 죽음에 ‘돌봄노동의 강도’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하면서 향후 로봇권을 보장하고 일정한 노동시간을 준수할 것을 약속한다. 비록 조류의 모양을 본뜨고 행동을 학습한 로봇일지라도 돌봄노동의 강도가 일정 수준을 초과하는 순간 사고는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는 시선을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셈이다.
노동의 양과 질을 수치화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돌봄노동 종사자들에게는 사회적으로 낮은 등급이 부여되고 가치가 절하된 대우를 받는다. 사실 많은 경우 돌봄노동은 그 경제적 가치를 인정받지도 못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사고가 일어나면 모든 책임은 돌봄노동 종사자에게 지워진다. 오주영보다 앞선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예를 들면 송현숙이 파독 간호사로 떠나거나 박영숙 시리즈 속 미친년들이 생겨나는 것도 이런 사실과 멀리 있지 않다. 이런 고통의 감각을 공유하는 것은 오랜 시간 자신을 포함한 주체들이 짊어져 온 책임의식을 반추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돌봄을 제공하는 자가 나일 수도, 나의 선대 조부모일 수도, 혹은 새이거나 로봇일 수도, 아니면 로봇이면서 새, 둘 다일 수도 있다는 생각. 이것은 고통에 대한 저항이 어떤 매커니즘으로 작동하는지,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각각의 차이를 통합적으로 인지한 결과물이다. 결국, 억압적인 생명 권력에 대한 저항은 여성과 비인간 존재들이 가지는 생태적 저항성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오주영의 또 다른 다큐멘터리 영상인 <불가능한 조감도>(2023)에는 국립생태원 소속 수의사의 인터뷰가 나온다. “새가 만약 토마토나 계란 같았다면, 새가 돌 같았다면. 그래도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생각해요. 새가 돌 같았다면 유리가 깨졌겠죠. 새가 토마토나 계란 같았다면 많은 지역의 유리가 피로 얼룩져있었겠죠. 그랬으면 심각성을 알고 해결할 수도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불행하게도 새는 돌이 아니고, 토마토나 계란도 아니에요. 그냥 조용히 사라지는 존재죠.” 이 영상 속에서 작가는 오랫동안 새의 날개를 가지길 바라 온 인간의 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자신은 그것을 지켜보다가 충돌해 사그라드는 그 날개에 매료되었음을 고백한다. 여기서 더 이상 작가는 이카루스의 날개처럼 새로운 물질로 비상하기를 욕망하는 존재에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날개와 함께 하기를 원하는 존재에 가깝다.
기술자의 정체성, AI 연구자의 정체성, 돌봄을 통과하는 여성의 정체성, 생태학적 함의를 고민하는 작가의 정체성은 하나로 통합될 수 없는가. 오주영의 ‘로봇 새 시리즈’ 여러 점은 최선을 다해 그 불가능성을 부정한다. 그리고 이 부정은 새와 인간과 로봇이 언제든 서로를 향해 통과할 수 있는 것처럼, 한 인간 안의 복수성도 서로를 통과할 수 있는 것임을 긍정한다. 이 메시지는 송현숙과 박영숙, 오주영이라는 세대를 하나로 통과한다. 내 안의 분절된 내가 수없이 반복되는, 언뜻 일률적이지 못한 행위들을 통해 나는 복수성을 가진 입체적인 수행자로 재탄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담고.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되었다가 너와 내가 우리가 되는 순간. 바로 거기서 새로운 공간이 생겨나고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메시지는 세대를 넘어 전유된다.
따를 수(隨)의 수행성은 이렇게 닦을 수(修)의 수행성과 멀어진다. 내가 하는 행위에 따라 내가 만들어진다는 의식, 그것은 수많은 ‘하기’와 엮이면서 실제 삶의 역동성을 만들어낸다. 이 역동성은 다시 한 번 서로에게서 서로에게로 옮겨가고 서로를 통과하며 전에 없던 에너지를 만든다. 내가 하는 행위가 나를 결정한다는 태도는 또한 나는 네가 될 수 있고 우리는 서로를 나눌 수 있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이 선언은 더 많은 일관성 없는 수행이 반복되기를, 세상에 더 다양한 목소리가 내비쳐지기를, 그리하여 그 목소리들이 뒤섞이고 서로를 떼어주며 다채로움을 만들어내기를 간절히 요구한다. 나는 계속 변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변하겠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따를 수의 수행성은 몇 세기 전의 낭만주의처럼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이 수행성은 이미 타자라는, 언제든지 내가 될 수 있는 다른 가능성을 획득했기 때문에.
(5) 도나 해러웨이, 「트러블과 함께 하기: 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 2021, 최유미 역, 마농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