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의 순기능

by 까나리

이혼한지 벌써 만5년이 지났다.

그새 주변에는 탈혼을 한 사람들도 꽤 늘어나서,

가까운 사람들 중에는 이혼을 하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힘드냐고 묻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아니면 탈혼 당사자들은 본인이 왜 이렇게까지 힘든지 잘 모르겠다고 물어오기도 한다.

사실 이제 내 머릿 속에서는 그 기억이 너무 오래 되어서 뭐가 힘들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뒤지게 힘들었던 것만 기억난다


그렇지만 이혼을 함으로써 어떤 게 좋았다,고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오늘 글에서는 이혼의 순기능(?)에 대해 쓸 것이다.

쓰기에 앞서, 나는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먹어 봐야 아는 굉장한 찍먹충임을 밝힌다.

모두가 나 같지는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이혼은 인생의 커다란 실패 중의 하나였다.

그 전에 딱히 실패라고 할만한 사건을 겪어본 적은 없다.

평범한 집, 평범하게 사이좋거나 싸우거나 평범하게 행복하고 불행한 가족,

평범한 인서울 대학교, 평범한 전공, 평범한 석사 학위,

평범하게 아니 운이 좋게 취업한, 남들이 보면 부러워 할법도 한 직장.


우리 모두는 원가족을 선택할 수 없다.

원가족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있는 것이다.

결혼이란 (거의) 유일하게 내가 가족을 선택할 수 있는 제도다.

그리고 내 선택은 실패했다. 내 결혼생활은 끝났으니까.

이걸 받아들이는 게 굉장히 힘들고 무거운 과제였다.


위로 차원에서 사람들이 요즘 세상에 이혼이 대수냐고들 하지만 아니? 당사자에겐 굉장히 대수다.

실컷 썸을 타다가도 이혼했다고 밝히면 "아, 그럼 저는 좀..." 하고 떠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실제로 있다.

그럴 수 있고 그 사람의 마음이지만 속이 쓰리다.


근데 어떡해. 그래도 삶은 계속 흘러간다.

결혼생활 끝났다고 죽을 순 없잖아.

거절 당하고, 그 와중에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도 있는채로 삶이 계속 흘러간다.

물론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을 만나기까지는 지난한 시도가 필요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채로 괴롭게 시간이 흘러가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이혼은 실패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그래도 (멘탈 꽃밭으로 살아온) 나한테는 분명히 거대한 실패가 맞았다.

실패를 받아들이는 태도에 변화가 생겼을 뿐이다.

오 시발 이거 한 개 실패했다고 내 인생 안 망하네.

ㅈ된줄 알았는데. 내 인생 이제 남자친구도 못 만든채로 죽을 줄 알았는데.

행여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도, 나 이혼했다고 말하면 소박 맞을 줄 알았는데.


근데 이건 다 내 상상이고 실제로 내 인생이 망하진 않았다.

그렇구나.

세간에서 "평범하다"고 말하는, "정상범위의" 삶에서 벗어나도 내 인생은 안 망하는 거였구나.


한국은 유난히 정상성에 대한 집착이 심한 나라다.

누군가 무심코 "결혼은 하셨어요?"라고 물었을 때 나도 무심코 "한 번이요."라고 대답했을 때,

돌아오는 상대방의 아차 싶은 머쓱한 표정을 봤을 때 이건 별 일이 아닌 게 아니라는 걸 실감한다.

그리고 그제서야 이런 사람들의 반응에도 내 삶은 잘만 이어져왔음을 느낀다.

아 실패해도 안 망하는구나.

결혼에 실패해도, 사업에 실패해도, 행여나 내 커리어에 문제가 생겨도, 학점에 문제가 생겨도,

동경하던 사람과 손절해도, 평생 좋아할 줄 알았던 일과 동떨어진 삶을 살게 돼도...

내 인생은 안 망하는구나.

실패해도 괜찮구나.

실패가 두려워 벌벌 떨던 것은 그냥 내 마음일 뿐이었구나.

그 두려움은 내 상상 속에 있던 것일 뿐이었구나.


이게 이혼의 순기능이다.

모르겠고 지금은 그냥 ㅈ같이 힘들다고요?

네. 힘듭니다. 나도 그게 너무 힘들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그런 일이 없길 바랐고, 지금도 바란다.

그래도 불행한 채로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앞에서 계속 쓴 것처럼 인생이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쓰지만, 실패한다고 인생 안 망한다.

이걸 깨닫고 한걸음 더 자유로워졌다는 게, 내 결혼과 이혼과 실패의 순기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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