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폐곡면 위에 올리면

재미로 보는 인생 편미분

by 까나리

1. 지금까지 누적된 것들의 총합이 지금의 나라면..

현재의 나는 시간이라는 매개변수 t 위에서 내 속도와 방향이 기록된 벡터장 v(t)을 선적분한 결과일 수도 있다. (❋ 주의: 벡터는 시작점과 종점은 중요하지 않음. 오로지 크기와 방향만이 중요할 뿐.)

내 삶의 흐름을 기술하는 벡터장을 따른 선적분이나 면적분을 통해 ‘나’의 위치 벡터를 기술할 수 있을까?

내 삶 전체의 궤적이 폐곡선인지, 아니면 어떤 폐곡면인지에 따라 적분의 방식은 달라질 수 있다.

지금의 ‘나’라는 위치는 지금까지의 삶의 방향성과 속도를 가진 벡터장의 흐름을 따라 선적분한 궤적일까, 아니면 내 주변 환경의 변화와 내면의 반응이 시간과 함께 만든 삶의 곡면 위에서 면적분된 하나의 총합일까?

뭐가 되었든 내가 남긴 선택과 사건들은 스칼라가 아니라 방향성을 가진 벡터들이었고, 그것들이 휘어진 시공간 위를 흘러갔으므로 결국은 곡률이 있는 어떤 구조 위에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이 현재의 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 삶을 다변수함수로 가정해보자!

일단, 산다는 건 오로지 나 혼자의 힘으로만 이뤄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선택의 순간과 그 순간에 따른 상호작용이므로 삶을 다변수함수라 가정하겠다.

f(x1, x2, x3…xn)에서 각 변수는 외압, 나를 둘러싼 환경, 신념, 저항, 기억처럼 나를 형성한 다층적 조건이 될 것이다. f(선택) = (외압, 환경, 신념, 저항, 기억…)

이 때는 선택이 종속변수이고 외압, 환경, 신념, 저항, 기억 같은 것들은 독립변수가 될 것이다.

(❋ 주의: 이 시점에서 또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선택은 정말 종속변수인가? 다른 것에 의하여 결정될 수 밖에 없는 것인가? 나라는 한 인간의 삶을 물리학적으로 미분할 수 있다고 보기 위해서 이런 가정을 했지만 여기에서 의견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경우에 특정한 선택에 영향을 준 요소 하나를 고립시켜서 편미분 하면, 그 선택의 순간에서 특정 조건이 내 선택에 끼친 국소적인 영향력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나라는 존재는 미분 가능한 존재가 된다. 편미분으로 내 선택의 순간들을 수학적으로 잘게 쪼갤 수 있고, 그 안에 어떤 힘이 작용했는지를 되짚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 주의: 너무 작게 미분하면 사라져버릴 수도 있으니 해석이 가능한 스케일을 조심스럽게 골라야 한다)


3. 그렇다면 내 삶은 폐곡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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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는 내가 쓴 걸 가지고 챗GPT가 만들어준 것이다. 뭐라고 써놨는지는 잘 모르겠고 아무튼 폐곡면이란 이 그림에서의 예시처럼 닫혀있는 곡면을 말하는 것이다. 구의 형태가 될 수도 있고, 중간이 텅 빈 도넛과 같은 모양이 될 수도 있다. 에너지가 보존되는 동역학계에서는 어떤 상태는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거의 같은 위치로 회귀한다.


여기서부터는 자기의 삶을 정의하기 나름일 것 같다.

삶이 폐곡면이라면, 각 점의 곡률은 다르고 방향도 다르지만 전체는 하나의 연결성을 가진다. 폐곡면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닫힌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삶이 자기완결적인 위상구조를 가진다고 믿는다면, 이 폐곡면 위에 그려진 불연속 또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삶이 폐곡면이라고 정의할 경우, 첫번째로 어디까지가 외부이고 어디까지가 삶인지 알 수 없는 닫힌 구조를 가지므로 삶은 내 안에서만 정의된다. 두번째로, 폐곡면인 삶은 순환한다. 폐곡면은 외부를 향해 열려있지 않으므로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예를 들면, 과거는 미래로 이어지고 시간은 나선형이든 원형이든 닫힌 궤적을 그릴 것이다. 예를 들어, 원래의 ‘나’라는 자아가 있다면 그것은 여러 곡률을 따라 흐른 다음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거라고 볼 수 있겠다. 세번째로, 폐곡면은 전체가 곡률(휘어진 비율)을 가진다. 미분한 각 면은 국소적인 방향이 다를 수 있겠지만, 결국은 자기 완결적인 구조를 가진다.


이 경우 나는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어딘가로 되돌아올 수 있다.

이 경우 나의 모든 경험에는 나름의 구조와 경계가 있다.

이 경우 내 삶은 충돌해서 여러 곳으로 흩어지는 산란이 아닌 하나의 패턴일 수 있다.

이렇게 삶을 인식하는 순간 내 삶은 더이상 흩어지지 않는다. 무한히 팽창해나가는 세계는 자유롭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가끔은 두렵기도 하니까..


4. 그러나 어떤 삶은 닫혀있지 않고 무한히 팽창한다. 갤럭시처럼.

삶이 닫혀있지 않다고 정의하면 어떨까.

그러면 삶은 끝없이 팽창하고, 그 삶 안에서 정보들은 무한히 파편처럼 산란하고, 과거와 미래는 더이상 정의가 불가능해진다. 열린 우주라고 함은 과거도, 미래도 끝없이 열려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런 삶이 나의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회귀는 불가능하다. 내 삶은 무한히 증가하는 엔트로피 속에서 일시적인 구조를 만들다가 흩어진다. 완성이라는 말 자체가 무의미해질만큼 계속해서 확산하는 과정의 총합이 내 삶이 될 것이다.


이 세계관이라면 나는 ‘완성’을 향해서 가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끊임없이 경계를 잃어버리면서 확산해 나가는 하나의 파동이 된다. 그러나 갤럭시 전체로 보았을 때 전체 에너지는 늘 보존되므로, 내 삶이 산란되어 사라지면 대신 누구인지 알 수 없는 타인의 삶이 시작될 것이다.


5. 그렇다면 “내가 관측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구조도 내 세계의 일부일 수 있을까?”

일반 상대성 이론을 적용하면 내 모든 선택의 순간들에 작용했던 트라우마나 배신, 사랑, 상처... 같은 비물질적인 것들이 내 시공간을 휘게 만든다.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는 어차피 고정된 좌표계란 없고 관측자에 따라 좌표계는 변한다. 결국 각자 보기 나름인 게 되니까, 누가 보기에 나의 어떤 선택은 낙오일 수 있어도 그건 다른 관성계에서는 가장 곡률이 높은 선택일 수 있다. 결국 나는 나만의 고유한 좌표계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내 삶의 전부를 관측할 수 없다. 결국 삶이 무한히 팽창한다고 믿는다면, 내가 보지 못한 구조와 내가 이해하지 못한 영향도 내 삶의 시공간을 휘게 만든다. 다시 말하면 나는 내가 이해하지 못한 구조까지 포함된, 나만의 고유한 다양체 위를 살아간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남긴 모든 힘과 흐름은 그 위에 적분되고, 사라지지 않는 비보존계의 흔적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나의 세계는 내가 만든 게 아닌, 내가 관측하고 해석한 일부분이 된다.


~재미로 보는 만약 내 삶이 벡터장 위의 폐곡면이라고 했을 때 챗GPT가 만들어준 비유적 수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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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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