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버전의 당신, 상상해 본 적 있나요?

난 있음. 사실 맨날 함. 근데 이제 외모는 아닌...

by 까나리

미리 짚고 가자면, 영화 <서브스턴스> 얘기는 아니다. 내겐 이제 외모에 쓸 에너지가 없다.


최근 정신과를 바꿨다.

나는 지방에서 근무할 때 공황/불안/우울장애가 아주 심하게 발병했기 때문에, 그 때 처음으로 정신과에 갔었다. 그 이후로는 거주지를 옮기면서 집 근처로 다니다가, 조금 더 잘 맞는 선생님을 찾고 싶어서 이번에 새로 병원을 바꿔봤다. 정신분석학을 전공했다는 그 의사선생님은 분명히 친절한 사람은 아니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 "왜, 뭐 때문에 오셨어요?"라고 내 위아래를 훑으면서 물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어렵다고 느낄만한 사람이었다. 엥, 이런 사람이 정신분석으로 유명하다고라. 그래도 난 꿇리지 않겠다!


"음.... 원래 병원을 다니고 있기는 했는데, 상담을 조금 더 하고 싶어서요."

의사샘이 "약은 먹은 게 있고요? 왜 상담을 하고 싶은데요?"라고 물었다. 너무 처음 간 곳이다보니 도대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 지를 잘 모르겠어서, "어.. 좀 더 잘 살아보고 싶어서요?"라고 말하고 웃었다.

선생님이 의아하다는 듯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세요. 잘 살고 싶단 말은, 지금은 잘 못 살고 있는 것처럼 느낀단 얘기인가요?" 이 말을 듣고 말문이 콱 막혔다. 아니, 다들 그런 생각 하고 사는 거 아니었어?

나는 조금 머쓱한 표정으로 "그.. 다들 그런 생각은 한번쯤 하지 않나요? 어쨌든 지금 막 잘 못 살고 있다는 건 아니고요.. 그냥 사회에 좀 더 잘 맞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어요."라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여전히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사회에 잘 안 맞는다는 게 어떤 측면에서 그런데요?"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측면에서요?"

선생님이 진짜 희한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대체 어디가 희한한건데. 말이라도 해보쇼 의사선생.


"직업은 뭐에요?"

"저는 미술관 큐레이터에요."

"그 전엔 어디서 일했고?"

"N 지역에서 일했어요."

"거, 지방이면 낙하산도 많고 이상한 사람도 많고 그럴텐데. 지방 생활 안해봤어요?"

헐. 정확하긴 한데, 아니 지방 생활 해봤어도 또 그런 건 모를 수도 있지 않나.

"...저 지방 사람인데요."

"아니, 여기도 지금 난리잖아요. 어디는 어떻고 저기는 저떻고. 다른 미술관 일을 안해본 게 아닐 거 아니에요."

"어.. 그건 지금 시장이 바뀌면서 그렇게 된거고요. 네. 그 전엔 여기 근처에서 일했죠. 그 다음엔 국립기관에서 일했고요."

"국립기관이면, 꽤 차이가 많이 났을텐데? 왜 다른데로 갔어요?"

"계약직이었는데요." 한 번에 질문에 대답을 다 하려 했더니 의사가 말을 끊는다.

"아 그럼 미술관 큐레이터라는 자리가 안정적인 자리가 아니에요?"

(확신에 찬) "네." 내가 이거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아니고 말고.

"그래서, 왜 다른데로 갔어요?"

"누가 오라고 전화를 여러번 해서요. 근데 저는 딱 대놓고 말 안하면 잘 못 알아들어요. 계속 아 네~ 주변에 좋은 사람 있으면 추천해드릴게요~ 이 말만 하다가, 전화가 네번째 왔을 때 '아니 추천 말고!' 이러셔서 알았어요. 아 이거 나보고 쓰라는 얘기구나. 그래서 써서 절차를 거치고 붙어서 간 거에요."

그 전의 이야기들이야 뭐, 병원에서 이제까지의 병력이나 복용했던 약, 간단한 이력을 알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거다. 근데 "대놓고 말 안하면 잘 못 알아듣는다"고 말하는 내 얘기를 듣는 의사의 표정이 미묘했다.

"음.. 오늘은 자율신경계 검사랑 뇌파검사를 한번 해보죠."


자율신경계 검사는 제일 처음에 정신과를 방문했을 때도 해본 적이 있어서 익숙했는데, 정신과에서 뇌파검사도 하는구나. 처음 알았다. 머리에 젤을 바르고 이상한 망 같은 걸 씌운다. (머리가 떡이 되니까 혹시라도 다음에 뇌파검사 하실 분들은 모자를 가지고 가시길 추천한다. 진짜 깜짝 놀랐네 내 머리 꼴 보고)

눈을 감고 5분, 눈을 뜨고 맞은편 벽에 붙어있는 까만 점을 보고 5분. 이런 식으로 검사를 진행했다. 진짜 지겹다고 생각했다. 검사를 하는 길지 않은 시간동안 내 머릿속에는 최근 합류하게 된 일 생각 밖에 없었다.

검사를 끝내고 곧 다시 결과를 보러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선생이 모니터를 내 쪽으로 돌려서 보여주면서, "뇌파엔 별다른 이상은 없는 것 같은데... 집중력이 그렇게 좋진 않네요."하면서 검사결과를 다음 장으로 넘기더니 "어? 이거 전형적인 ADHD 뇌파인데?"라고 했다. 헐. 내가 ADHD라니. "보세요, 세타파랑 베타파가 이렇게 되어있고 하이베타가 앞쪽에 이렇게 활성화 돼있잖아요.(들어도 뭔 소린지 모르겠다) 이건 전형적으로 ADHD인 사람들의 뇌파에요. 이런 사람들이 보통.. 눈치가 좀 없어요." 사실 나는 늘 내가 ADHD가 아닐까 의심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이 말을 듣고는 좀 속이 시원했다. "오! 저 ADHD에요? 아 나 ADHD구나~!" 깨발랄하게 대답했다. 의사선생님도 어딘가 신나보였다. "아니 어쩐지, 얘기하는 거 들어보면 분명히 책도 많이 읽고 연구도 많이 한 사람 같은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내가 본 ADHD 환자들 중에 사학을 안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요. ADHD 환자들이 그렇게 잡다한 지식을 집어넣는 걸 좋아해요." 여전히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다. 책 읽고 연구하는 거랑, 선생님이 이상하다고 생각한거랑 무슨 연관이 있죠... 물론 나는 (미술)사학 덕후이긴 하고.. 학창시절에 늘상 공부도 꽤 잘 했고 산만하다거나 그런 일은 없었지만. 그 외엔 공황에 만성적으로 시달린 사람 특유의 긴장도가 높은 점 등을 짚어주셨다.


의사선생이 말을 이어나갔다. "아마 어릴 때부터 ADHD가 있었을 것 같은데, 어릴 때 약을 먹고 통제하는 법을 배웠다면 괜찮았을 거에요. 그치만 그게 안되었다면 성인이 되면서 이걸 통제하는 게 엄청 힘들었을 거에요. ADHD인 사람들이 주로 자기 생각 밖에 못해요. 머릿속에서 생각이 너무 빨리 지나가거든요. 그래서 그 말을 필터링 없이 했다가 눈치가 없다는 소리를 들어요. 약물치료를 하면 '내 능력이 이정도였어?'라고 생각할 정도로 비약적으로 능력이 상승할 겁니다. 다만, 이 약물이 성인한테 중독성이 좀 강해요. 그래서 지능검사랑 주의력검사를 추가적으로 실행할 거에요. 그걸 해보고, ADHD라는 게 진짜 확실해졌을 때 약물처방을 해줄게요." 하고는 지능검사랑 CAT 예약을 해줬다.


네네.. 다 알겠는데.. 내 머릿 속에는 '자기 생각 밖에 못한다고? 근데 난 그렇게 자기중심적인 인간은 아닌데..'라는 생각 뿐이었다. 운전을 해서 집에 돌아오면서도. 그리고 생각하다가 알게 됐다. 아, 그러니까 그게 '자기' 생각이 위주가 아니라 자기의 '생각'이 위주라는 거구나. 남들보다 상대적으로 생각의 흐름이 속도가 빠르게 진행되는데, 그러다보니 내 생각을 위주로 말하게 되고 그게 타인에게 눈치 없어보일 수 있는.. 그런거구나 하고 깨달았다.


한 3일 정도 후에 다시 병원에 방문해서 지능검사랑 집중력검사, 주의력검사를 했다. 갈 때 내 지능 돌고래 아이큐 정도로 나오면 어쩌지 생각했다는 건 안 비밀이다. 9시 30분에 갔는데 12시 반에 끝나서 거의 세 시간이 걸렸다. 집중력검사는 거의 사기업에서 하는 적성검사 느낌이었다. 약간.. 마이다스 아이티에서 만든 인적성 검사가 생각나서 조금.. 트라우마가 도질 뻔 했다. 예를 들면 똑같은 도형 나올 때 스페이스바 누르세요, 이번에는 그 도형이 나올 때만 빼고 스페이스바 누르세요, 똑같은 소리 나올 때 누르세요 뭐 이런 거. 물론 사기업에서 하는 게 훨씬 빡친다 해당 도형만 빼고 스페이스바를 누르는 걸 '충동억제검사'라고 하는데, 그거 할 때 나 그냥 다 틀린 것 같다. 에라 몰라.


그리고 그림도 그렸다. 집, 나무, 가족, 사람 그림. 다른 것보다도, 나무 그림에 대해서 그리고 설명한 게 기억에 남는다. 나는 A4 용지의 한 귀퉁이에 겨울에 마른, 아직 떨감들이 조금 붙어있는 감나무를 그렸다. 선생님이 그걸 보고 간단하게 질문을 했다.


"이 나무는 어디에 있어요? 주변에는 어떤 게 있나요?"

"어.. 여긴 깡촌이에요. 주변에 그래서 막 낮은 담벼락도 있고 다른 과실수들도 있고.. 무화과나 석류나무 그런 거요. 그래서 구석에 그렸어요."

"이 나무는 몇 살 정도 됐나요?"

"얘는.. 음.. 나이가 많아요. 저보다 많아요. 한 70살 정도?"

"나무는 나중에 어떻게 될까요?"

"나무는... 계속 나이 들어갈 거에요. 막 200년 이렇게. 그래서 그 자리에서 계속 인간들이 하는 걸 지켜볼 거에요. 저는 막 500년 이렇게 나이 들고 오래된 나무들 볼 때마다, 저 자리에서 인간들이 하는 짓들을 다 봤겠지 이런 생각을 하거든요."

"그렇군요. 나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요? 기분이 어떨까요?"

"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새싹도 나고.. 또 다시 열매도 맺는..."

"나무한테 소원이 있다면 뭘까요?"

"음.. 베어지지 않고 계속 이 자리에 있는 거요."

아무런 생각 없이 이 대답을 하고는 조금 울컥했다. 나도 베어지지 않고 내 자리에 있고 싶다. 봄이 되어서 새싹이 나고 잎이 무성해졌다가, 열매를 맺고, 또 떨어지고 겨울이 와도 좋으니 타인에 의해 베어지지만 않고 싶다.


어찌 되었든간에 힘겹게 집중력을 쥐어짜내서 검사를 마치고 진료를 보러 들어갔다. 의사샘이 날 보더니 "검사해보니 어땠어요? ADHD면 감이 올텐데. 나는 그거 힘들더라고요."라고 했다. "감이요? 감은.. 모르겠고.. 사기업 적성 검사랑 비슷한 느낌이었어요. 근데 그거 막 세시간을 하는데 안 힘든 사람이 있나요?"라고 물었다. "있어요. 안 힘들대요. 집중력 좋은 인간들은요."라고 하셨다. 난 사실 지능검사에서 내 아이큐가 막 돌고래 수준으로 나오면 어떡하지 이런 걱정을 하면서 갔기 때문에.. 물론 의사샘은 지능검사가 실제로 지능을 검사하는 게 아니라 집중력을 보는 거라곤 하셨다. 그러나 한국인이라면 그것에 대해서 의식 안 할 수 있나!


그래서 의사샘한테 "쌤, 근데 저 지능검사 한 거 막 돌고래 수준으로 아이큐 나오면 어떡해요?"라고 물었다.

의사선생이 갑자기 정색하면서 "그게 가능한 소리에요? 한국에서 돌고래 아이큐면 좋은 대학 못가요. 한국 고등학교 교육을 안 받은 사람처럼 말씀하시네."라고 했다.. 그.. 위안이 되네요 예...

지능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2주 정도 걸린다. 예약이 꽉 차 있는데 선생님이 점심시간을 빼서 봐주시겠다고 했다. 그리고 본인의 상담비용은 45분에 20만원인데, 제일 첫 방문에는 그다지 추천하지 않는듯 하시더니 나에게 상담 받는 걸 권장하셨다. 자기 확신이 낮다고 했다. 예를 들면,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표현 같은 것들에서 그게 느껴진다고 했다. 모두가 그렇게 표현하지는 않는다고. 나는 "그렇지만 저는 저한테 못되게 군 사람들 이제 마음 속에서 장례식 다 치뤄줬는데요. 이미 제 맘 속에선 다 죽었는데..."라고 대답했다. 의사선생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것과 별개로 오랫동안 가스라이팅 당한 것들은 의식에, 말투에, 행동에 묻어있어요.

원래 자기 모습으로 돌려놔야 해요. 1주일에 한번, 길어도 6개월 정도면 가능할 겁니다."


병원을 나왔다.

끊임없이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생긴다. 이걸 해결하면 저 문제가, 저걸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나쁘지 않다. 나는 이런 식으로 나를 구성하는 축들이 더더욱 다양해지고 확장되길 바란다. 점점더 과거의 내가 탐구해온 것이 내 세계의 더 작은 일부가 되기를 바란다. 아직 탐구할 것이 무한하게 많을 수 있기를 원한다. 그럴수록 나는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냥 이 모든 것들이.. 더 나은 버전의 나를 찾는 여정처럼 느껴진다.


HAVE YOU EVER DREAMT OF A BETTER VERSION OF YOURSELF?

YES, YES, YES.

I ACTUALLY ALWAYS DREAM OF BECOMING A BETTER VERSION OF MY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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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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