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쳐도 괜찮다. 살아만 있으면.

미친놈을 이기는 건 오직 좀더 미친놈 뿐이다

by 까나리

한동안 나는 지방에서 일했다. 나도 지방 사람인데, 이제 다시는 지방에서 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일종의 지방(fat 아님) 혐오 같은 것으로 그 모든 것들을 뭉뚱그려버린 셈이다.


갑자기 그 때 당시에는 너무 바쁘고 제정신도 아니라서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들이 생각났다. 학예'연구'사로서의 직업적 시선을 가지고 봤을 때 나에겐 서울 전시는 이제 재미있는 게 하나도 없다. 나는 거대한 서사로서의 작가가 궁금한 게 아니다. 지방에서 일할 때 제일 재밌었던 건 아무도 몰랐던, 아니면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던 그 지역의 근현대작가들을 연구하고 발굴할 때였다. 누가 누구한테 쓴 한문이 뒤범벅 된 편지를 마침내 해석할 수 있게 됐을 때, 거기에 도움되는 내용이 있었을 때.. 그런 게 희열이었다. 나는 주로 이런 걸 위해서 야근을 했다. 낮에는 행정처리 민원처리 하느라 정신이 없으니까.


나는 거기서 여러 작가들을 발굴해냈다. 구례 출신의 누구, 강진 출신의 누구, 조선대에서 교수를 했던 누구... 그 중 몇은 유족분들이 인격적으로 정말 좋아서, 지금도 종종 연락하고 지낸다. 내가 처음 그룹전을 열 때, 아버님이 이 지역 분이셨으니 미술관에서 몇 점을 매입하고 싶다, 그리고 전시에 작품을 빌려주실 수 있냐고 했다. 아드님이 엄청 기뻐하시면서 안 그래도 아버님의 아뜰리에가 곧 재개발에 들어가서, 작품들을 해결해야 하는데 자식들 중엔 그림에 관심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고민 중이었다, 기꺼이 작품들을 기증하시겠다고 했다.


신수동의 아버지 아뜰리에에 작품들이 다 있으니 와서 보고, 전시에 가져갈만한 작품을 골라보라고 하셨다. 그래 이런 게 학예연구사 일이지. 그래서 작품을 빌려다가 연구를 하고, 그 지역의 미술사와 관련한 그룹전을 열었다. 게다가, 작업을 하고 보니 화백의 와이프 그러니까 아드님의 엄마도 우리 학교 자수과를 나왔고 근현대 자수로 유명한 분이었다. 그룹전을 열고 나서도 2년에 걸쳐서 그 댁에 있던 오래된 스케치나 드로잉, 편지들, 원광대 교수할 때의 명함들, VCR 비디오들, 사진들, 명함에 화가 친구와 짧게 주고받은 편지들.. 이런 걸 모두 디지털라이징 했다. 낭만이 있는 시대였다. 그런 편지들을 보고 있는 것 자체가 마치 내가 그 시대로 함께 빨려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이 일을 했다.


f5d01862ec7e800915da7f8e32c83c96.gif 우디앨런의 <미드나잇 인 파리>. 주인공이 과거의 파리에서 헤밍웨이를 만나는 장면.


다 합하니까 아카이브가 2천점이 넘었다. 그리고 작품도 몇십점 가량을 기증해주셨다. 나는 1년 반이 지나고 그걸로 개인전을 열었다. 아드님과 사모님이 일부러 한번도 옥션에 작품을 팔아본 적이 없는데 공립미술관에 소장되면 그건 영원히 남을테니까, 이 지역 사람들은 영원히 이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게 고맙다고 여러 번 얘기하셨다.


나는 큰 전시장을 쓰고 싶다고 말했었는데, 관장이 작은 전시장을 쓰라고 했다. 알겠다고 했다. 전시를 열고 나니 관장이 전시를 크게 열었어야지 까나리 걔가 작은 데에다 한다고 해서 전시평이 안 좋다고 했다. 그리고 다른 지역 사람들이 그 화백이 다른 도 출신이지(출신은 분명 여기인데 다른 지역 대학에서 교수했다는 이유로) 왜 여기서 하냐고 뭐라고 한다고도 했다.


그룹전을 열 때 연락했던 사람들 중 고 누구누구 화백의 유족, 고 머시기 화백의 유족, 여러 사람들이 있었는데... 내가 말하지만, 유족 중 젠틀한 분은 정말 몇 안된다. 젠틀한 분이었다. 내가 어찌어찌 연락처를 찾아내서 연락을 드렸을 때 이 분도 기뻐하면서 지금 어머니 댁이 따로 있는데, 작품이 다 거기 있으니 와서 보라고 했다. 그리고 작품도 기증하시겠다고 했다. 기증을 받으면 감사의 표시로 보통 개인전을 연다. 실제로 기증을 100점 넘게 받았다.


디렉터는 기증과 그 작가의 개인전, 이 모든 걸 나와 상의 하나 없이 경력이 별로 없는 다른 학예사에게 업무로 넘겨줬다. 그 학예사는 기증도 개인전도 다 자기가 열었다고 한다. 그 때 당시엔 너무 바쁘니까, 누구라도 하면 됐지 뭐..라고 생각해버렸다.


읽다보면 알겠지만, 전시를 열 때 작가 개인전이 아니라 '미술사적'으로 스토리를 만들고 풀어가는 전시는 공이 많이 들어간다. 모든 유족들에게 컨택하고, 협의하고, 저작권 허가를 받고, 작품을 각 집에서 운송해오고, 그러고도 없는 작품들은 타 기관의 협조를 받아서 대여해와서 만들어야 한다.


미술관 경력이라고는 시골의 작은 사립미술관에서 인턴 6개월이 전부인 다른 학예사가 내가 하는 걸 보고 그게 보기 좋아보였나보다. 해외 작가 전시를 할 때 <뇽뇽 작가와 한국미술>이라는 이름으로 미술사 전시를 만들겠다고 했다. 주제를 보자마자 위험하다고 생각했지만 별 말은 안했다. 연구사적으로 연도의 범위를 너무 넓게 잡으면 스토리를 풀기가 정말 어렵다. 그건 짬이 아주 많은 학예사가 하는 일이다.


그는 뇽뇽 작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보이는 작품을 어디 먼 곳에서 빌려왔다. 그래도 아무말 하지 않았다. 그 전시가 열리고 나서 중앙지 문화부 기자들이 와서 날카로운 질문들을 그 친구에게 해댔다. 중앙지의 저명한 문화부 기자들은 경력이 너무 많기 때문에 가끔은 우리보다 훨씬 더 통찰력 있게 전시를 꿰뚫는다. 마음에 걸렸던 딱 그 작품을 보고 이 작품은 왜 빌려왔냐,고 했는데 그 친구가 "사실 이거 말고 다른 걸 빌려오고 싶었는데 그건 안빌려준다고 해서 대신 이걸 빌려왔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홍보담당자가 황당해 했다.


그러고는 저녁즈음 야근을 하던 내가 흡연실에서 담배를 피고 있는데, 거기 들어와서는 "샘 따라하려다가 나 망했어."라고 했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이렇게 말했다. 진짜 황당했는데, 칭찬이려니..(니가 망한 게 니 능력 부족이지 내 탓이겠니?) 생각하고 넘겼다. 그 때 당시엔 너무 바쁘고 이런 것들이 기분은 나쁘지만 부당하다는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리고 모든 일이 그렇지만 미술계 일은 특수하니까 어디에 말해봤자 이해 받지 못한다는 생각도 컸다.


그래도 거기가 다 거지 같았냐 하면, 꼭 그렇지는 않았다. 그 곳의 풍경은 정말, 나는 이런 건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느낄 정도로 아름다웠다. 봄이면 겹벚꽃이 한가득 피고, 여름엔 색색의 배롱나무와 선홍빛의 능소화가 피고, 가을부터 날씨가 온화한 겨울까지는 금목서, 은목서 향기를 어디서든 맡을 수 있었다. 동네엔 어딜 가든 연두빛과 보랏빛이 섞인 무화과가 주렁주렁 달렸거나, 이제 막 익어서 아랫부분이 터져가는 루비빛의 석류가 달린 나무들이 있었다. 모든 색상들이 너무 선명해서 원래 세상이 이런 색이었나? 생각할 정도였다. 새파란 하늘에, 붉은 빛의 비옥한 토양에, 햇살이나 구름의 정도에 따라 색을 바꾸는 바다의 색깔. 처음 보는 원색의 세상이었다. 아마 고갱이 타히티에 가서 이런 느낌을 받았을까 상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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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찍은 다채로운 색채의 풍경들. 이런 것들이 나를 간신히 숨쉬게 했다.


나는 수시로 바다를 보러 쏘다녔다. 퇴근하고, 야근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날에, 아니면 쉬는 날에. 형광등이 깜빡거리는 소리나 PC본체가 윙윙대며 돌아가는 소리가 너무 시끄럽다고 느껴지는 날에도 바다는 조용했다. 만원짜리 낚싯대를 사서 아무것도 안 잡히는 낚시를 하거나, 피자를 한판 사서 바다를 보면서 먹거나, 노래를 들으면서 담배를 피웠다. 차로 40분만 달리면 다양한 바다가 지척이었다. 같은 시간이면 다른 도로 넘어가서 그 곳의 바다도 구경갈 수 있었다. 나는 캠핑의자를 차에 싣고 다니면서, 마음에 드는 곳 어디든지 그걸 펴놓고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봤다. 대책없이 반짝이는 그 물결들을 마다하는 건 어려웠다. 이거슨 내가 계수이긴 하지만 사주에 물 기운이 별로 없어서 그런겐가(?)


그러다가 어느 날은 바다를 보면 ‘저기에 들어가면 춥겠지..’라고 생각했고, 어느 날은 공항에서 서울로 출장가려고 비행기를 타면서 비행기가 떨어져서 그냥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맨날 쇼핑몰 광고만 나오던 인스타그램 계정에 어느 날은 “자살방지 공익광고”가 떴다. 아 이건 뭔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그때야 알았다.... 바다로 시작해서 갑 분 호러스토리로 끝내기.


근데 안 죽고 지금까지 살아있으니까 된거다^.^

미쳐도 괜찮다. 살아있기만 하면 된 거다.


어른들은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거다"라고 하는데, 그건 직장에서 쓰는 말이 아니다. 진짜 힘들어서 죽고 싶을 때 그걸 참고 살아남은 사람은 강인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죽지 마세요. 살아남으세요. 세상에 살만한 예쁜 것들이 있다는 진부한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세상이 조까타도 살아남아요. (고 김새론 배우의 죽음을 애도하며.. 이 문단은 그와는 상관이 없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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