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벽돌집을 쌓다가도, 언제든 무너뜨리는.
부지런함이건 게으름이건 어느 쪽이던 간에 관성이 생기는 것 같다.
부지런히 하루를 바삐 살다보면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무의식적으로 부지런하게 살려고 한다. 이럴 때는 부지런히 살지 않으면, 뭔가 근질거리기도 하고 뭔가 잘못한(?) 느낌도 받으며, 다시 부지런히 살도록 내면에서 채찍질을 하는 것 같다.
반대로 게으름에도 관성이 생겨 한없이 나태해지고, 나태의 늪으로 빠질 수 있다. '이미 꼬였는데 뭐~', '이미 글렀는데 뭐~' 등 깨진 유리창의 법칙처럼 작은 나태함 하나가 엄청나게 확산되며 확 게을러지곤 한다. 그리고, 나태하게 계속 살다보면 그것에 적응하여, 조금만 뭘 하더라도 금방 지치고, 더 쉬고 싶어지며 결국 더 쉬게 되는 것 같다.
부지런함이건, 나태함이건 특정한 행동을 계속 반복하면 습관이 되는 행동들도 있다. 하지만 단순히 일찍 일어나고 늦게 일어나는 등의 습관같은 반복적이고 규칙적인 행동을 넘어서는, 뭔가의 더 큰 힘이 존재하는 것 같다. 사고 방식, 행동, 태도, 무의식 등 그 방향으로 엄청나게 영향을 주는 힘, 마치 관성 같이 말이다.
그리고 부지런함과 게으름뿐만 아니라 선함과 악함, 진보와 보수 등 무엇이든 이런 관성의 힘은 존재하는 것 같다.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어떻게 생각하고 믿느냐에 따라, 자기 인식, 신념, 가치관 등에 따라서 말이다. 자신이 행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생각하는 대로, 믿는 쪽으로, 인식하는 쪽으로, 가치관대로 우리는 행동하고 그것들은 강화된다. 또, 때로는 거꾸로 특정 믿음을 강화시키기 위해 행하기도 한다. 절대적인 진리, 객관적인 사실, 논리성 등에 반하더라도 말이다. 우리에게는 절대적인 진실보다도, 상대적인 진실, 스스로 진실이라고 믿는 진실이 중요할 뿐이다. 그리고 각자의 세상에서는 그것이 절대적인 진실이기도 하다.
다시 이 관성 같은 힘으로 돌아온다면, 이 힘은 관성 같기에 해당 방향으로 계속 작용하지만 반대 방향으로 충분한 힘만 가해진다면 언제든 운동 방향을 바꿀 수 있다. 언제든 부지런해질 수 있고, 언제든 나태해질 수 있으며, 그것이 계속 유지될 수도 있다. 좋은쪽이건 나쁜쪽이건 간에 언제든 특정 방향으로 확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특정 계기로 나쁜 쪽의 손을 털고 한 순간에 확 바뀌는 것처럼 말이다. 계기가 생기건, 계기를 만들건, 무언가의 깨달음을 얻건 간에 여러 방법으로 분명히 언제든 변할 수 있다.
물론, 방향을 바꾸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동안 가해져있는 관성보다 강한 힘이 필요하기에 쉽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힘은 분명히 충분히 얻을 수 있고, 그 힘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있다. 우리의 사고 방식, 마인드, 가치관, 인식, 믿음, 신념 등 안에 말이다. 우리가 변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달렸고, 변하지 않는 것도 자기 자신에게 달렸다. 우리는 변하지 않을 수도 있고, 언제든 확 변할 수도 있다. 우리는 그런 존재다.
신경가소성은 뇌가 성장과 재조직을 통해 새로운 뉴런 연결을 형성하며 스스로를 재구성하는 능력을 말한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뇌의 물리적 구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는 곧 관성과 같은 힘이 존재함을, 인간의 변화 가능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좋은 쪽이든, 안좋은 쪽이든 관성은 생기며, 큰 힘만 있다면 어느 쪽으로든 변화가 가능하다.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대로, 믿는 대로 무언가가 강화될 것이며, 우리의 크고 작은 것들은 언제든 변할 수 있다. '사람은 안변한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다'와 같은 변화 가능성에 대한 부정적인 말들이 있다. 이는 그만큼 어렵고, 스스로의 의지와 계기가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의 의지와 계기만 있다면 우리는 분명히 변할 수 있다. 우리는 무언가를 강화시키기도 하지만,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그런 존재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