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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깡지 Jan 19. 2023

'희생', '위해서'라는 말을 지워버린 이유

직장맘의 육아일기

우리가 '희생'이라는 말을 가장 흔하게 쓰는 경우가 부모가 자식에게 보여주는 태도에서다. 다수, 집단, 조직에서도 '희생'이 종종 언급된다. 비슷한 의미로 '누구를 위해서'라는 표현도 쓴다. 

서른 살을 막 넘겼을 무렵,  나의 삶에서 '누구를 위해서', '희생'과 같은 말을 지웠다. 이런 단어를 남겨놓게 되면, 내가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각하는 대상이 알아주지 않거나 고마워하지 않으면 '섭섭'한 마음이 들 것 같아서다. 

처음 계기는 일터에서였다. 일터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으면서 아이를 키우면서도 고스란히 적용되었다. 

당시 Data Architecture팀의 리더였다. 천 명 가깝게 투입된 대형 프로젝트 였기 때문에 아키텍처, 인프라 등 팀은 수백명에게 영향을 미쳤다. 

나 역시 개발자, 모델러들에게 가이드를 만들어 교육을 했고, 이들이 제대로 진행하는지 점검을 하면서 가이드와 지침이 구석구석 제대로 전파되고 있는지 욕심껏 일했다. 

많은 이들이 함께 모델링을 진행하기 때문에 메타시스템이 있어야 이를 통해 효율적으로 작업을 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메타시스템 구축이 논리/물리 모델링 보다 더 늦은 일정이었다. 

그렇다 보니 프로젝트 참여자들의 고충이 이만저만 아닐것 같아서 엑셀 메크로를 만들어서 이를 각자 활용하면 메타시스템에 구축되기 전까지 어느 정도 임시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몇 개월 후, 프로젝트가 중반을 향해 달려가고 모든 사람들이 예민해지다 보니 팀들의 입장들이 서로 맹렬히 부딪치기 시작했다. 

하고, 안하고 문제가 아니라 팀들간 입장자체가 방어적인 기제로 증폭되는 현상을 낳았는데 그 갈등은 '공통 영역' (프로젝트 관리, 아키텍처, 인프라) 과 '개발 및 데이터 실행영역'의 대립관계를 낳았다. 

메타시스템 구축은 우리 팀의 역할이 아니라 다른 팀이 따로 있었다. 그러나 메타시스템 없이 데이터 아키텍처를 구축하는 것은 소위 말하는 dog노가다이기 때문에 '개발자를 위해' 메타시스템 구축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엑셀매크로를 제작 배포하였다. 

하지만 '개발팀 입장'에서는 공통팀들의  의도가 어찌되었건, 자신들에게 '일을 시키는 조직' 중 하나일 뿐이기 때문에  '선의'가 아니었다. 

그때 '개발팀을 위해' 라고 생각했던 나의 사고방식에 대해 다시 되짚어보게 되었다. 

굳이 엑셀메크로를 만들어 배포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메타시스템 팀의 늦은 구축일정에 대해 이슈만 제기해도 되었다. 

개발팀이 각자 비효율적으로 모델링을 해도 그건 개발팀의 책임이었다. 

향후 모델의 퀄러티를 검증했을 때, 문제가 있다고 이슈를 제기하는 것만 해도 내가 맡은 역할 그 이상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예상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의'를 가지고 엑셀매크로를 만들어 배포하고, 매주 모델링 결과를 검증해 주었을 때 나의 기본 생각은 '개발팀을 위하여' 였다. 아마도 우리팀에게, 나에게 고마워하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서로의 사정에 대해 그리 잘 알지 못한다. 메타시스템이 있건, 엑셀매크로가 있건, 맨땅에 엑셀로 기록을 하건, 개발팀은 '바로 그 일'을 해야 하는 역할을 가지고 있을 뿐이고, 업무효율성을 위해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에게 일을 시키는 조직이 있을 뿐이다. 

이 사실을 깨닫고 다시 나에게 물어봤다. 

"개발팀을 위해서" 그런 아이디어를 냈고, 

그리 힘들게 우리팀원들을 닥달하며 개발팀의 퀄러티 까지 챙깃 것이 맞냐고. 

맞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는 것이 훨씬 정신건강에 이롭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개발팀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일욕심' 때문에 한 행동이었고 내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생각을 바꿨다. 

한국인들은 '관계'를 중시한다. 내가 이만큼 베풀었으면 다시 나에게 무언가 돌아오는 것을 기대한다. 

그 기대에 부흥하지 못하면 실망을 하게 되고 이는 '갈등'의 원인이 된다. 

개발팀을 위해서 한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들의 모든 언행이 섭섭하게 느껴질 수 있다.  

이런 현상은 부모, 자식간에도 흔하게 나타난다. 

"내가 어떻게 너를 키웠는데" 

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내가 아이를 위해서 노는 것도 포기하고, 직장도 포기하고...' 등으로 생각하는 것은 나를 갉아먹는 '독'이 된다. 

냉정히 생각해서 '아이를 위해서'가 맞는지도 잘 살펴봐야 한다. 

아이를 잘 키우고 싶고, 뭐든 해 주고 싶은 '부모 욕심'도 분명히 있다. 

워킹맘은 기본적으로 아이들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반대급부로 이렇게 힘들게 일하며 너희를 키워줬는데 하는 '자신의 인생을 담보로 한 희생'을 하고 있다는 생각도 한다. 사실 이건 워킹맘 뿐 아니라 전업맘도 마찬가지다. 

젊은 사람들 중 아이를 낳기 주저하는 이유도 잘 키울 자신이 있을까도 있지만 '나를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에 대한 걱정도 있다. 

직장에서 나의 역할이 커짐에 따라, 가정에서는 아이가 태어남에 따라 점차 나를 활활 불태워야 할 일이 생기기 시작한다. 마음의 여유도, 시간적 여유도 부족해지고 체력도 한계가 온다. 아무리 봐도 뭔가 희생하고 있는 것 같기만 하다. 

 

그러나 나는 일터에서 역할이 커질수록, 아이가 태어나면서 부터 아예 '발상의 전환'을 했다. 

자의든 타의든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은 '내가 원해서' 했거나, '원하지 않더라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와 타인의 관계를 끊어냈다. 

나는 종가집 맏며느리이기도 하다. 지금은 많이 간소화 되어으나 10년 전까지는 일, 육아 뿐 아니라 집안일까지 정말 많았다. 

제사와 차례를 합해서 10번이 넘었다. 직장을 다니고 있는데다 어머니가 워낙 큰 살림의 베테랑이셔서 비록 큰 역할은 하지 못했어도 야근에 찌들어 살다가 명절 연휴에 아이얼굴 제대로 못보고 다시 집안일을 하다보니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명절기간 다들 휴식을 취하고 출근할 때 나는 여전히 다크서클이 내려와 있었다. 

이때도 긍정적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은  '희생'이라는 생각은 아예하지 않았다. 

그냥 '내가 해야 하는 일'이었고, 이왕이면 그 속에서 '재미'를 찾았다.

그래서 좋은 점이라면 지금까지 거의 '억울'할 일이 없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아이는 알아서 자기 몫을 하기 시작했고, 일터에서는 업무 숙련도가 올라가면서 더 요령있게 사람들을 대하게 되었고, 집안일도 상당히 간소화 되어 이전 같지 않다. 

혹시 누군가가 "고마웠어요.", "덕분이에요."라고 말하면 '그 팀을 위해 애쓴 점을 알아주는구나."로 생각하지 않고 "내가 일을 그래도 효율적으로 잘 했나보다."로 여겼다. 즉, 외부의 칭찬은 칭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으쓱할 일이 아니다. 나는 그저 나의 만족을 위해 내 일을 했을 뿐인 것이다. 

일에 올인하고, 교육에 올인하는 경우는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상대방은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는다. 

나에게 집중해 보면 답은 의외로 심플하다. 

그 어떤 행동이건 '나를 위해서'한 것이다. 

내가 한 행동에 대해 남에게 기대하면 실망도 커진다. 

내가 서른 부터 하나씩 바꾼 것은 '바깥에서 안으로' 생각의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칭찬, 고마움의 표현을 받을 때는 '기분 좋은 일'은 맞으나 '기대'는 절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보다는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노력했던 것 같다. 

그 결과는 '밝고 긍정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점이다. 

이 훈련은 앞으로도 계속 해 나가려고 한다. 

사람은 그 자리 머물러 있는 것 같지만 퇴보하는 경우도 많아서다. 

흐르는 강물에서 제자리 있으려면 노를 저어줘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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