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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깡지 Jan 10. 2023

짧게는 불균형이지만 길게는 균형

직장맘의 육아일기

이번 글은 과거에 대한 하소연도 있고, 그 과정을 거쳐왔기 때문에 가져보는 여유도 있는 글이다. 

아이를 키우는 분들 중 '지금 너무 힘들다'라고 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지난 이십 년을 돌아봤다. 

나도 그때는 힘들었으니까. 

그런데 힘들기만 한 것이 아니라 소중한 추억이 더 많았고, 그때 힘들었기 때문에 지금 여유가 감미롭게 느껴진다. 


물론 오늘의 감미로움이 사라지고, 갑자기 내일  '힘든 일'이 생길 수 있다. 

과거의 나를 비추어 보건데 이제는 힘든 일도 잘 지나갈 수 있다는 자신이 있다. '그렇게 힘든 일도 잘 견뎌냈는데 이 정도쯤이야' 하는 내성이 생겼다. 원래도 무던했으나 어지간한 일은 더욱 무덤덤해졌다. 


혹시 지금 누군가 힘들다면 자신을 잘 도닥거렸으면 좋겠다. 

너무 힘들어 미칠 거 같아도 

내 힘으로 안 되는 것은  미련 버리고 마음을 잘 다스리고, 

내 힘으로 힘들어 보이는 것은 포기만 안 하면 언젠가는 바뀌어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이 지나면 꽤 커진 나를 발견할 수 있다. 


나도 아직 '진행 중'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겨우 아이 하나 대학 보냈을 뿐이다. 

나처럼 대학을 보내고 손 털어버린 부모가 또 있겠나 싶긴 한데, 여전히 나의 관심은 션의 성취보다 '션 그 자체'이다. 션이 밥 잘 먹고 있는지, 션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궁금하지, 션의 성적이나 취업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다. 션이 의욕에 차서 이것저것 하겠다고 말할 때도 있고, 축 쳐져서 힘들다고 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이야기 잘 들어주고 믿음을 주는 게 나의 남은 부모로서 소임 같다. 


사람마다 '시간'은 달리 흘러간다. 


누군가가 '쉽게' 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알고 보면 그 이전에 미리 해 둔 것이 많다. 기본적인 절대량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션은 머리로 하는 건 뭐든 빨리 배운다. 기억력도 상당히 좋다. 션이 자기가 머리가 좋은 것 같다고 말하길래, "네가 빨리 배운 건 그 이전에 읽어둔 책의 힘이 커. 너도 모르게 상식도 쌓여 있고 항상 새로운 걸 접해 왔으니, 무엇이든 배울 때 쉽게 접근하고 쉽게 덤비는 거지, 뭐든 공짜는 없는 법이야."라고 말해줬다. 

션이 관심가지면 허투루 넘기지 않고 책으로, 체험으로, 영화로, 연결시켜주었던 것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똑같이 학원 보냈는데, '저 아이는 왜 잘하고 우리 아이는 못하는 것 같지?'라는 생각이 들 때, 그 아이가 이전에 어떤 가정환경에서 자랐는지를 봐야 한다. 이미 생활에서, 부모에게서  자연스레 많은 것을 익힌 경우가 많다. 


혹시 아무리 노력해도 제자리에 있는 것 같다면, 그 절대량을 채우는 중이므로 스스로 '나는 안돼' 하지 말고 '그래 언젠가는 되겠지, 안 돼도 어딘가 쓰일 거야' 하며 다독거리면 좋겠다. 


달리기 할 때 그랬다. 천하의 몸치가 1분 달리면 숨 넘어갈 것 같던 내가 '뭐 하다 보면 되겠지' 하고 포기하지 않았더니 10km을 달리게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10km이 별게 아닐 수 있으나, 내가 가장 못하는 게 운동이었고 운동 못한다는 콤플렉스가 평생을 지배해 왔기 때문에,  50이 다 되어서 가진 이 경험은 지금까지 내가 가졌던 그 어떤 성취감 보다 컸고 '내가 못한 운동도 하니 되는데,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해 낼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을 주었다. 


아주 이전 글, 그러니까 15년 이상된 글들 중 너무 힘들지만 주먹 불끈 쥔 글들이 종종 보인다. 

그  글들을 읽으면, 그 당시로 소환이 된다. 

다른 사람이 읽으면 넘어갈 사소한 글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너무 힘들 때는 글을 남기지 않았으니까. 두더지처럼 땅을 파고 들어가 해결될 때까지 그리 삽질을 하다가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슬그머니 나와서 한숨 돌리고, 아주 가끔 블로그에는 '요즘 좀 바빴다.' 정도로 가볍게 썼으니. 

하지만  그 한 문장을 쓰기까지 고군분투했던 날들이 떠오른다. 


20대는 션이 없었다. 

그 당시는 새벽 퇴근, 몇 날 며칠 집에 못 들어가고 밤샘 작업 등이 너무 당연했다. 몸이 힘든 건 맞으나, 다 힘드니까 이 모든 상황이 당연했다. 

그래도 그때는 내 몸은 자유로웠던 시절이었다. 피곤하면 자면 되고,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가면 되었다. 


30이 되자마자 션이 태어났다. 

나의 역할은 커져서 리더로 일해야 하면서 이 꼬맹이에 대한 책임도 져야 했다. 이제는 가족 중 누구 하나 아프기라도 하면 엄마로서 나의 부재를 션파가 대신해 주며 근근이 돌아가는 가정 시스템이 마비가 된다. 

절대 아파서 안 되는 기간에 돌입했으니 피곤함은 그다음이었다. 피곤이 겹치면 아예 링거를 미리 맞기도 하고 주기적으로 한약도 먹었다. 

남는 시간이 있다면 션에 온전히 다 주어도 부족한 시간이었으나, 어린 션은 항상 엄마를 목말라했다. 


서른부터 늦잠, 낮잠이라는 단어는 사라졌고, 몇 시에 잠이 들건 오히려 새벽에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당시는 아침형 인간, 지금은 미라클 모닝이라고 불리나, 나는 일찍 일어나기만 한 게 아니라 일과 아이 둘 다 돌봐야 했으므로 늘 늦게 잤다. 수면시간이 상당히 짧아져 버렸다. 

션파가 가사일을 나보다 훨씬 많이 해 준 덕에, 션과 있는 시간은 양적으로는 턱없이 부족해도 질적으로는 충분했다. 서너 살 때까지는 새벽 두세 시 넘어까지 매일 그림책 읽어주고, 그다음은 한동안 영어동화책 읽어주고, 션이 잠들면 놀아줄 궁리 하고 재료 준비해서 또 한 2년 넘게 온갖 엄마표 놀이를 진행했다.

주말에 틈 나는 대로 미술관, 박물관, 여행, 체험 등 많이도 다녔다. 

잠은 부족했을지 몰라도, 이렇게 가족이 함께 한 시간이 나를 더 피곤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활력을 주었다. 션이 하루가 다르게 커 가는 모습 또한 너무 사랑스러웠다. 어른들이 '아이들 금방 자라, 그때가 제일 예쁠 때야'라는 말씀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IT컨설턴트가 겉보기에는 참 멋져 보이는 직업이다. 이때만 해도 컨설턴트에 대한 '존중'이 컸고, 외국계 컨설팅 회사는 들어가기 힘든 꿈의 직장이기도 했다. 하지만 컨설턴트들은 백조같이 일했다. 겉은 우아하나 물밑은 사정이 달랐다. 게다가 나처럼 성취감을 즐기는 스타일은 일에 몰입을 잘할 수밖에 없었다. 


이 무렵 개발자에 대한 배려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과거처럼 야근과 주말근무를 함부로 요청했다가는 슬슬 사회문제가 되려는 분위기가 생겼다. 

그러나, 컨설턴트는 아니었다. 여전히 야근과 주말근무를 해야 했다. 

건물에 비유하자면 설계도면을 가지고 건물을 짓는 일을 개발자가 한다면, 어떤 콘셉트의 건물을 만들지, 어떤 설계를 해야 할지, 이 건물을 만들기 위한 전체 계획을 어떻게 세울지, 건물을 짓는 과정이 제대로 돌아가는지 등이 컨설턴트의 영역이다. 

한마디로 답이 있는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 보니, 9 to 6라는 시간이 의미가 없다. 

그런데 이 일이 나에게 잘 맞았는지, 체력적으로도 힘들고 머리 부하도 많았으나 중간중간 성취감을 느끼며 일했다. 


션이 유치원을 가고 학교를 가면서 '아이 친구 엄마'들이 내 인생에 들어왔다. 

이때부터 멘털이 꽤나 흔들렸다. 이것도 지금은 덜한 듯한데 그 당시는 워킹맘과 전업맘의 벽이 꽤 두터웠다. 

션이 공부를 잘할수록 친구 pool 이 넘사벽과 엄친아 그룹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지금에서 고백하지만 문화차이로 인해 멘붕이 온 적이 많았다. 

무언가 달라도 많이 달랐다. 어떤 부분은 '나도 저래야 하나' 싶었고  어떤 부분은 너무 버거웠다. 

친구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꿰고 있는 모습에 놀라기도 했고, 가끔 평가를 내리는 모습에 무서울 때도 있었다. 

반면, 아이에 대한 섬세한 관심과 케어를 보고 배운 점도 많았다. 


주말에 친구 엄마들 만나서 좋은 정보 듣고, 좋은 조언을 듣는 것까지는 좋으나, 자꾸 이전처럼 션을 있는 그대로 봐주지 못하고 '남의 시선'으로 내 아이를 보게 되었다. 션은 울퉁불퉁 마구 버무린 주먹밥인데, 깔끔하고 반듯한 삼각김밥으로 다듬으려 덤빌 거 같았다. 

무엇보다 내가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엄마들의 한숨이었다. 자식 자랑도 그리 불편할 때가 있겠으나, 걱정이 한가득한 한숨도 그리 유쾌하지 못했다. 어쩔 때는 그 일대 땅이 꺼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월요일 출근이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일을 가지고 회의실에서 갑론을박 싸우는 게 훨씬 나았다. 


결국은 나와 너무 다른 전업맘들의 모습에 내가 빠져나왔다.  

션에 제주에 간 것은 션의 성향을 잘 관찰한 후 내린 결정이긴 하나, 결정적으로 '다른 엄마들과 탈 노선'을 걷게 된 계기도 되었다. 

소위 말하는 정보는 나도 목마르나 항상 그랬듯, 책과 손품으로 하기로 했다. 

그간 했던 나의 업무 성향도 어쩌면 션에게 많이 적용되었던 것 같다. 

미리 알아보고, 최선이 아니면 차선책으로 하고, 가능하면 멘땅부터 시작해서 뿌리를 튼튼하게 해 두고.. 

무엇보다 션의 말에 더 귀 기울이고 대화를 했다. 


션을 제주에 보내기로 하기 직전, 사실은 나의 미래도 어느 정도 방향 전환을 했다. 동업자와 함께 회사를 아예 차려버렸다. 하지만 규모는 키우지 않기로 했고, 경영만 하는 회사가 아닌 직접 컨설팅을 계속하기로 했다. 

내 이름을 걸고 하는 일이 되다 보니, 더 쉬이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적극적인 업무태도가 더 적극적이 되었다. 


멀리 있는 션에게 신경도 계속 써야 했다. 

난데없는 사춘기로 2년을 휘청하기도 했다. 이때는 "그래, 대학 안보내면 그만이지, 어쩌겠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정신을 차리더니 이번에는 학생회장이 되었다. 그것도 2년 연속. 

문제는 남자학생 엄마가 자동 학부모 대표가 된다는 것.  그렇지 않아도 회사에 신경 쓸 일이 많은데, 환장할 노릇이었다. 내 성격상 이름만 걸어 놓고 일하지도 않으니 자기 발목 자기가 잡았다. 회사일이 바쁜데 학부모 대표 노릇도 꽤나 열심히 했다. 안 해도 되는 잡일까지 다 했다. 누가 알아봐 주는 것도 아닌데. 

게다가 션은 션대로  엄마 얼굴 보여주고 싶어서 주말이면 제주로 갔다. 

(션이 보고 싶어 갔다는 표현을 쓴 게 아니라, 엄마 얼굴 보여 주고 싶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내 마음보다 어린 션 입장에서 엄마를 보고 싶어 하는 마음에 더 비중을 두어서다.)


션의 고등학교 마지막 해에는 션이 엄마를 제주로 불렀다. 지금까지 그런 적이 없던 아이가 엄마를 불렀다. (다른 글에서 상세히 썼으니 자세한 내용은 생략) 

'일은 어떡하나' 

'프로젝트에서 같은 공간에 있지 않고 다른 곳에서 컨설팅이 가능하기는 할까?'

절대 안 될 것 같은 일이었는데, 했다. 1년간 제주/서울 출퇴근을 시작했고, 안 되는 일도 되게 했다. 나 혼자는 힘들었고, 나와 함께한 동료들이 있어서 가능했다. 


'제주 유배를 가는구나'로 시작했던 이 1년간의 삶도 생각을 고쳐 먹으니 나에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운전도 못하고 요리도 못하는데 어떻게 제주에서 사나 싶었고, 고3 엄마의 고단함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나 싶었다. 무작정 나선 길거리. 처음에는 그냥 걸었다. 무념무상이 이런 건가 싶었는데, 하늘과 풀과 바다가 보였다. 그렇게 나 홀로 올레길 걷기가 시작됐다. 마음을 비우고 또 비웠다. 

걷기를 마치고 돌아오면 책상에서 씨름하는 션이 보였다. "괜찮다, 잘 될 거다" 끊임없이 위로해 주었고, 못했던 요리도 아들 녀석 예쁜 밥상 차려주니 함박웃음으로 보답해 주길래 노트에 플레이팅 디자인까지 하가며 그리 재미나게 했다. 요리는 달리기와 더불어 두 번째 나의 트라우마 극복이었다. 

제주/서울을 오가는 긴 출퇴근 시간은 아예 좋아하는 책 읽기 시간으로 만들었다. 


대게 고3 부모들은 아이가 공부할 때 두문불출한다. 우리 부부는 그러지 않았다. 둘이서 여기저기 많이 다녔다. 당연히 대화도 부쩍 늘었다. 혹시 내가 고3 엄마 모드로 갈 것 같으면 션파가 붙잡아 줬다. 끊임없이 션의 대학결과가 나오기 전부터 '괜찮다'라고 서로 격려해 주었고, 그 곁에 산과 바다가 있었다. 자연의 에너지 받아서 밝은 얼굴로 션을 대해줬다. 


션의 대학 합격 소식과 함께 1년간 제주 살림 정리하고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그 사이 회사 차린 후  대형 프로젝트 3개째 참여했고, 작은 컨설팅도 사이사이에 했다. 회사 규모는 작지만 고객사에서 꽤 인정을 받았다. 프로젝트를 할 때 영향력이 가장 큰 조직이 되어서 더욱 겸손해져야 했고, 더욱 실수 없이 일해야 했다. '답 없는 컨설팅'이지만 예술가가 혼신의 힘을 다해 예술품을 내어 놓듯, 그렇게 고민해가며 자료를 만들고 발표를 했다. 다행히 고마워 하시실래, 우리가 더 고마워하고 있다. 


이 글도 길긴 하지만 20년 세월을 적기에는 턱없이 짧다. 

여기저기 흔적이 있으나, 앞으로도 불쑥 옛 생각나면 또 이리 글을 적을 것 같다. 

20년을 회고해 보니, 그 당시에 Work & Life balancing에 대해 고민한 적이 많았다. 

일도 버겁고, 아이 키우는 일도 버거운데 이 둘을 다 하고 싶고, 다 잘하고 싶어서다. 

그때 나의 선택은 

1. 고민할 시간에 무조건 시작하고 

2. 최선이 안되면 차선책을 택하고 

3. 이왕 시작했으면 훗날 '잘했다'라고 생각할 수 있게 꾸준히 하고 

4. 모든 걸 다 못하니 '가지치기' 해서 한두 가지만 집중하자 

였다. 


그렇게 하다 보니 짧은 기간은 불균형이지만, 긴 기간에는 균형이 맞추어져 간다. 

그 당시 '10년 후에도 이렇게 살고 있으면 어떡하지?' 싶었는데, 10년 후에는 '다르게 살고 있었다.'


아이를 키우며 일하는 엄마들 참으로 버겁다. 아무리 누가 도와줘도 대신해 줄 수는 없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이왕 할 거면 '긍정적으로 마음'을 바꾸라는 것과, 지금의 힘듦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밤 11시, 12시에 퇴근하고 와서 천근만근 무거운 몸으로 꾸벅꾸벅 졸면서 새벽까지 그림책 읽어주었던 그 시절이 영원하지 않았다. 

새벽에 동네 돌아다니며 빈 상자 구해와서 션 놀잇감 만들어 놓고 션이 깨어났을 때 '짠'하고 보여주었던 그 시절도 영원하지 않았다. 

주말이면 도서관에 손 잡고 다녔던 그 세월도 영원하지 않았다. 

제주/서울 출퇴근도 영원하지 않았다. 


내가 30대 초반 받은 조언이 하나 있다. "일과 육아 모두 100점으로 하려고 하지 마, 지칠 거야. 70점만 해도 합하면 140점이야. 모두 다 완벽하게 다 잘하려 하지 말고, 조금만 힘을 빼서 꾸준히 하도록 해"였다. 


오늘  나의 삶은 불균형일 것이다. 

일에 몰입하는 날도 있고, 일보다 아이에 집중하는 날도 있다. 

그것도 내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 날이 많다. 

그렇지만,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산다면 오늘 하루가 '행복'해 질 수 있다. 

일도, 아이도 언젠가 내 손을 떠나는 날이 온다. 

비록 지금은 '나의 인생'이 어디 있나 싶겠으나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를 만든다. 

놀았으면 논대로, 열심히 했으면 열심히 한 대로 다 나에게 돌아온다. 

그렇게 긴 인생동안 균형이 맞추어진다.



이 땅의 워킹맘들 힘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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