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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깡지 Jan 09. 2023

'워라밸은 없다'는 아들 생각

IT에세이

워라밸은 Work & Life Balance로, 일(Work)과 삶(Life)의 균형을 이루자는 말이다.

나처럼 IT프로젝트를 하는 경우, 나의 직장생활 대부분 동안 제시간에 퇴근하는 일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다. 야근은 기본이요, 주말 출근도 빈번히 했었기 때문이다. 프로젝트가 한참 진행 중일 때나 테스트 단계 돌입하면 아예 daily meeting 시간이 저녁 9시에 한 적도 있었다.

그때 비하면 지금은 정말 좋아졌다. 꽤 많은 분들이 제시간에 퇴근하고, 억지로 야근하라는 눈치를 주지 않는다. 진척이 늦거나 시급히 해야 할 일이 있는 경우, 시스템 오픈을 앞둔 경우가 되어야 야근을 한다.


사회 전반적으로 근로 분위기가 좋아진 것도 있지만, 언제부터인가 변화하기 시작한 젊은 사람들 덕분도 있다. 직장 생활에 오래 몸 담은 분들 눈에는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일의 마무리를 떠나 시간이 되면 퇴근을 하고, 늦은 시간 일거리를 요청하는 것에 대해 부당하다고 말하며, 회식 역시 일의 연장이기 때문에 미리 공지하지 않은 회식이나 갑작스러운 점심 식사 제안 등을 꺼리는 분위기를 많이 낯설어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 변화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꼰대'와 '직장 내 갑질'이라는 단어가 뉴스에 빈번히 등장하면서 직장에서의 변화는 제법 급물살을 탔다. 코로나 기간도 한 몫했다.


젊은 사람이라고 표현했으나 이제는 나이, 연차와 상관없이 '저녁 있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사회분위기와 기업문화가 바뀐 것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일'이다. 일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았는데 프로젝트의 하루하루가 흘러가는 일이 빈번히 생긴다. 해야 일의 마감일을 지켰다고 쳐도, 이번에는 그 일의 퀄리티가 문제다. 결국 문제가 터져 전체 일정을 연장해서 일의 퀄리티를 높이는 재작업을 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이를 지켜보는 마음은 점차 착잡해졌다. 야근을 하고 철야를 해서라도 일을 제대로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전반적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한 마음가짐과 집중도가 상당히 떨어진 기분이었다. 기업에서 내/외부 직원들에 대해 업무상 '강제성'을 부여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물론 처음부터 부족한 일정이 아니었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반대로 묻고 싶다. "그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 그 어떤 노력이나 이슈를 제기했느냐"라고.

어딘가 모르게 '과도기'적인 모습이 곳곳에서 보인다. 아마도 이런 모습도 점차 개선이 될 것이다.  


그런데,

워라밸 (Work & Life Balance)이라는 단어에 대해 점차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삶에서 '일'을 분리하는 것이 어딘가 모르게 어색해 보였다.

나 역시 20대에서 40대 나의 하루 대부분을 '일터'에서 보냈고 집은 잠만 잠시 자는 곳인 경우가 많아서 '내 삶'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많았으니까. 무엇보다 아이를 돌볼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서 당시의 Balance는 일과 여가시간이 아니라 일과 육아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나이대마다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다. 20대, 30대는 업무적인 성장을 하는 기간이 맞았고 IT프로젝트 특성상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서는 시간 투자도 당연히 따랐다. 40대부터는 그동안의 경험이 쌓여 훨씬 빠르게, 그리고 훨씬 넓은 시야로 일할 수 있었다.

젊은 시절의 경험이 쌓이다 보니 어느 날 갑자기 프로젝트 전반을 객관적으로 보고 진단할 수 있는 재능이 생긴 셈인데, 처음에는 여러 면에서 검증을 해 보다가 어느 순간 확신이 생겼다. 소위 말하는 일의 '복리'가 적용되었다.


이 모든 과정에는 '내 시간을 도둑맞았어'가 아니라 오랜 기간 동안 내 소중한 시간을 투자하여 얻은 '일에 대한 성취감'이 함께 했다. 긴 세월을 버터온 힘은 자기만족과 자기 확신이었다. 누군가의 칭찬이나 치하가 있을 때 당연히 기분은 좋지만, 그보다는 내가 원하는 수준으로 일을 해 낼 때 스스로에 대해 느껴지는 쾌감은 제법 짜릿했다.


하루 24시간을 늘릴 방법은 없고 일도 하면서 아이도 키워야 했으니까 '과거의 내'가 생각하는 워라밸은 '일이 곧 내 삶의 일부이다'였다. 그 기간이 평생이 가지 않을 것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으므로 가능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다른 선택지가 없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좋아서' 스스로 야근을 해서라도 일을 제대로 하려 한 나의 과거가 미련스러울지 몰라도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인가, 바쁜 와중에 짬을 내서 여행을 가고 취미생활을 하는 것이 여간 달콤한 것이 아니었다.


며칠 전 이제 갓 대학생이 된 아들 션과 이야기를 나눴다. 나름 목표를 세우고 있었고, 지금 당장 해야 할 공부가 얼마나 많은지 자신이 원하는 수준에 도달하려면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고 했다. 빠르게 실력을 올리려면 어느 정도 기간 동안을 한 가지 일에 집중하고 몰입하는 기간이 필요하다며 다음 학기는 그것 한 가지만 신경 쓸 것이라고 했다.

친구를 좋아하는 아이라, "친구들 만나서 놀자고 할 텐데, 괜찮겠어?"라고 하니, "어쩔 수 없지, 미뤄둬야지."라고 한다. "그랬다가 친구들 다시 만났더니 소원해지면?"이라고 물으니 "괜찮아, 몇 개월 도전이라 친구들 간 거리가 멀어지지도 않겠지만 끝내놓고 다시 친해지면 돼."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고등학교 때 경험이 참 좋았다고 말한다.

그때는 '스스로 정했던 집중/몰입기간'에 대해 여러 면에서 챌린지를 받았다고 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하버드 인강 1년짜리 코스인 Data science를 겨울방학 한 달 동안 끝내겠다는 야무진 목표를 삼았던 일이다. 1년 코스라고는 하나 일주일 한 번 씩 1개의 강의 진도를 깡그리 모아서 한꺼번에 진행하면 물리적인 시간은 가능해 보였나 보다. 막상 해 보니, 내용을 숙지해야 함과 동시에 소논문까지 포함되어 있어서 하루종일 공부를 하더니 급기야 마감일 다가 오자 밤을 새우는 일이 빈번하게 생겼다. 결국 과정 사이사이에 있는 테스트도 통과했고 마지막 소논문 심사까지 마무리 잘했다.

이때 친구들은 "그걸 굳이 왜 해?"라고도 했고, 션이 밤을 새우는 동안 친구들은 놀았기 때문에 자신도 놀고 싶어서 이중고를 겪기도 했다. 노는 친구들이 어찌나 행복해 보이던지 상대적 박탈감도 느껴졌나 보다.

션은 입시를 마치고 나서 다시는 내일이 오지 않을 것 같이 개월을 그리 놀면서 친구들에게서 '할 때 하고 놀 때 노는 멋진 놈'이라는 타이틀도 얻었다.


션은 하버드 인강뿐 아니라 여러 가지 도전적인 경험들을 거치면서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으며, 모든 일은 복리로 굴러간다.'를 배웠다고 했다.


대학생이 된 후, 몇 년 후, 몇 십 년 후의 모습을 그려보면서 입버릇처럼 "나는 OOO 한 사람이 될 거야."를 말한다. 아마도 자신에 대한 다짐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워라밸이라는 단어는 없어. 하고 싶은 것을 제대로 하는 게 옳은 삶이고 높은 수준을 원하면서 적당한 노력을 하는 건 말이 안 돼."라고 말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싶으면 당연히 시간 투자가 필요하며, 그 과정에서 하기 싫은 날이 있는 건 당연한데, 이를 한탄하며 '노는 것'을 끼여 넣어 억지로 밸런스를 맞출 필요가 없다고 부연한다.

어미에 아들이다.


일도 공부도 내 삶이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면, 또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면,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본인 판단하에 집중할 필요는 분명 있다. 많은 책에서 그릿, Flow, 몰입 등을 이야기한다.

빅터 플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도 삶의 의미를 일, 사랑, 시련에서 찾고 있다.

내가 조직에 대치가능한 존재가 아닌 린치핀이 되고 싶다고 말하면서, 경제적 자립을 이뤄 빠른 은퇴를 하겠다는 파이어족을 꿈꾸면서, 워라밸을 주장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일을 사랑하고 몰입할 줄 알며 끈기 있게 해 나가는 사람이 일을 긍정적으로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삶의 균형을 다양하게 맞추어 나갔으며 부는 자연스레 따라왔다.


'워라밸'이라는 단어를 전면에 내 세우고 그 뒤에 숨어서 '현재의 안일함'을 내 삶의 균형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가끔씩은 뒤돌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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