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리터러시를 위한 짧은 습작들
건축가 정기용은 "성장이 곧 형식이며 곧 내용이다"라는 문장으로 형식과 내용의 오랜 이분법적 사고를 일거에 분파했다. 성장이란 곧 시간의 쓰임 가운데 제 모습을 계속해서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볼 때, 본래적인 형식이라는둥 맥락에 맞는 내용이라는둥의 주장은 무색해지는 것이다.
비움이 깊어질수록 이미지를 따라가는 시선도 함께 풍성해진다. 창조적 비움을 통해 본다는 것의 숨통이 트이고 그 안에서 상상력이 발동한다. 여백의 디자인은 고도로 정제화된 미학적 실천이지만 잘만 적용한다면 보는 이에게 꾀 선명하고 직접적인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다.
"달밤에 흑백장면이 얼마나 감정을 풍부하게 하는지 아는가? (중략) 또한 언덕, 나무, 돌 등의 형태는 색깔을 띠지 않을 때 더욱더 그 자체 고유의 언어로 말한다"
왜 그토록 흑백 이미지에 예술가들이 집착하는지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해되는 문장. 빛과 색의 사실성이 완전히 제거된 상태에서 오직 형태와 움직임의 고유한 정서만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힘이 흑백 이미지에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즉물주의 사진은 현재와 미래를 초월하는 과장된 트릭에 의해 구사진과 구별된다. (중략) 기교인 표현이 문명, 생동감 있는 신체의 활력 그리고 필연성이라면, 기술인 내용은 문화, 영혼의 구원 그리고 영원 불멸의 그것이다"
우리 시대의 그래픽 징후 중 하나인 비정형에 대해서도 비슷한 견지를 세울 수 있다. 레트로도 미래주의도 그렇다고 현재의 이데올로지를 반영한 것이 아닌, 오직 순간의 감각만을 고정화 시킴으로써 이미지를 영원성 안에 가두려는 실천들. 그런데 이러한 데카당스를 우리 시대를 제대로 명쾌하게 설명해 줄 이념의 부재로 설명하는 것은 한없이 20세기적인 방식이다. 20세기가 외재적인 갈등 관계로부터 삶의 영원성을 끌어냈다면 지금의 비정형은 그러한 영원이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순간들의 반복과 포개짐을 통해 거짓된 이념에 따라 진지해지는 것을 계속해서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덧없음을 극복하려는 태도는 금새 지루해질 것이므로.
"존재의 가벼움에 욕망의 육중함을 더하니 소주 한 병의 무게와 같더라"
워드마크가 점점 둔중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딱 소주 한 병 정도의 무게감으로 말이다. 뭐 소주 한 잔이라도 주고 받게 만드는 브랜딩이라면 여하튼 성공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미는 은신처다. 미에는 은폐가 본질적이다. (중략) 미에는 불투명함이 내재한다. 불투명하다함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는 뜻이다. 폭로는 미에서 마술을 제거하고 미를 파괴한다. 따라서 미는 본질적으로 폭로되지 않는 것이다"
가리움으로써 전체로서의 진위가 가늠되는 요즘이다. 마스크로 인해 사람의 눈이 보이고 그 너머의 마음이 속삭이는 걸 느낀다. 바르샤바 게토 뮤지엄의 그래픽 디자인에서 주인공은 찢겨지고 은폐된 작품이 아니라 그 주위를 둘러싼 글자들이다. 글자가 레이아웃의 일부가 아닌 하나의 전체로서 내보이도록 작품을 찢고 뜯고 은폐하는 전략을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