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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깡셉 Oct 24. 2017

[인박스] 밀레니얼과 함께 굿 라이프!

그들은 이미 자신의 삶 안에 다양한 프로젝트를 창조하고 있다.

밀레니얼 논의를 위한 톤앤매너 맞추기


소위 크리에이티브 분야에서 사람들의 감성과 메시지를 표현하는 지금의 방식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영상이 있다. 첫 번째는 싱가폴 관광청이 만든 홍보 영상 <Where Passion is Made Possible>, 두 번째는 패스트패션 브랜드 H&M의 2017 가을 컬렉션 영상, 마지막으로 에퀴녹스 크리에이티브 팀이 만든 소수자의 섹슈얼리티를 주제로 한 <The LGBTQ Alphabet>이다.



각 영상이 다루는 주제의 농도와 내용의 범주는 상당히 다르다. 그러나 이야기의 주인공을 표현하는 색감, 카메라의 시선, 음악의 전개, 이미지의 서사가 상당히 비슷한 점을 보인다. 당대의 영상들이 일관된 톤앤매너(Tone&Manner)를 이룸으로써 ‘유행’을 형성하기 때문에, 유사해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렇지만 특정 시기 사람들이 욕망하는 삶의 이미지를 톤(Tone)이라 하고, 욕망의 실타래를 풀어내는 서사의 구조를 매너(Manner)라 본다면 단지 유행이라고 치부할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삶의 풍경, 생각, 감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나치게 화려한 색감, 들썩거리는 몸의 동작, 계속 어딘가 부유하는듯 하지만 발걸음은 힘차고 당당한 모습, 초월적인 스토리텔러가 아닌 주인공이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펼치는 내러티브, 나의 생각, 나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표현되더라도 마지막에는 당신(You)의 삶과 내면의 영감에 주목하는 메시지…


이러한 톤앤매너의 요소들이 어우러져 이야기를 만들고 광고를 발신한다. 이때 광고를 만드는 크리에이티브들은 특정 시기의 스타일을 발견하고 조립하는데 전문적인 역량을 발휘한다. 흔히 레퍼런스를 통해 영감을 받고 프로젝트에 맞는 톤앤매너를 편집한다고 말해지지만, 이는 겉으로 보았을 때만 – 특히 제안서만 놓고 볼 때 – 호응하는 추론이다. 그는 이미 일상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시각적인 삶을 기반으로 소위 먹혀주는 ‘스타일’을 자연스럽게 상상한다. 레퍼런스의 역할은 동떨어져 있는 수많은 인상들 즉 자신의 시각적 데이터를 하나의 선으로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광고의 유행은 레퍼런스의 자기표절적 발전(?)이 아니라 시각적인 삶의 거울이면서 일상을 구성하는 다층적인 감정과 생각을 편집한 것이다.

상기의 세 가지 영상이 톤앤매너가 비슷하며 하나의 ‘유행’이라 생각되는 것은, 영상의 크리에이티브가 포착한 우리 삶의 어떤 모습이 분명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 영상들이 근거하는 우리 삶의 모습은 <밀레니얼 Millenials>라 불리는 특정 세대의 풍경에 있다고 본다. 



밀레니얼의 두 가지 특징 : 성찰적 자기애와 타인과의 지속적인 연결

본래 밀레니얼 세대는 미국의 소비 시장이라는 특정 맥락에서 통용되는 말이다. 밀레니얼 세대를 구분 짓는 정확한 시점은 없지만 대체로 현재 미국 소비 시장의 30%을 차지하는 19~35세 사이를 밀레니얼로 일컬어진다. 미국의 밀레니얼 세대는 베이비붐 세대를 넘어 소비를 주도하며 문화적 트렌드를 선도하는 세대가 되었다. 내가 보기에 미국 밀레니얼이 보이는 특징은 성찰적인 자기애와 타인과의 지속적인 연결이라는 다소 상충하는 단어로 이야기할 수 있다.


이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 언제나 주도적이기를 원한다. <스스로 주관하는 삶>이라는 개념은 새로울 것이 없다. 그렇지만 밀레니얼은 가족 형성과 주거의 방식 그리고 자녀 양육의 계획 같은 전통적인 삶의 주관적 울타리에 대해 이전 세대와 달리 얽매이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삶을 주도한다는 것은 가족과 직장의 울타리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위치를 스스로 ‘선택’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밀레니얼은 가족과 직장의 울타리를 쉽게 넘나들 수 있다고 믿으며 정체성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라 믿는다. 따라서 부모 세대의 입장으로 볼 때 안정된 삶의 경로를 자주 이탈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나이든 철부지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밀레니얼은 오히려 그 반대다. 이들은 감정의 기복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감정과 생각을 지니며 무엇을 좋아할 지 끊임없이 성찰한 후에 삶의 행로를 결정한다. 안정적인 삶 내에서 재화(대표적으로 집과 자동차)를 소유하는 것 보다 자신의 삶과 서사를 충만하게 만드는 것에 더 큰 방점을 찍는다. 소유는 자기를 둘러싼 울타리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게 하는 재화의 소비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대변할 수 있는 성찰적 소비로 변모한다.


강력한 자기애로 무장한 밀레니얼이지만 동시에 타인과의 연결 또한 자신의 삶에서 놓칠 수 없는 가치다. 단지 SNS로 수많은 타인과 소통하는 이들의 커뮤니케이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삶을 좀더 깊게 들여다 보면, 타인과의 공유와 감정 교류 그리고 협업을 통한 즐거움의 창조라는 보다 긍적적인 연결을 추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밀레니얼들이 펼치는 다양한 프로젝트는 느슨하지만 강력한 자기 확신으로 결합되어 있다. 그것은 기존 세대가 보기엔 노는 것으로 보이기 까지 한다. 자신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타인과의 연결을 구하는 인증샷 놀이는 이러한 프로젝트 중의 한가지다. 


페미니즘에 동의하든 안하든 밀레니얼은 자신의 생각을 불특정 타인과 공감하는 놀이를 펼치는데 주저함이 없다.


또 세대 담론? 그렇지만…

물론 이러한 밀레니얼의 가치관은 후기 소비자본주의 시대의 변동을 보여주는 거울일지 모른다. 가깝게는 2008년 미국의 금융 위기 이후 사람들에게 퍼진 내면화된 좌절을 어떻게든 극복하려는 발버둥일 수 있다. 아니 실제로 그러하다. 집과 자동차의 소유에 얽매이지 않는 것은 그것의 소유가 간단치 않은 것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세대가 걸어온 삶의 형태를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좌절감이 뿌리 깊게 존재한다. 더욱더 불타는 자기애를 욕망하고, 외부의 타인과의 연결을 통해 어떤 공공 의식을 확보하려는 것은 가정과 사회의 전통적인 울타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밀레니얼 세대 담론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작동한다. 이 비판은 세대 담론의 허구성을 지적하는 것으로, 세대론이란 그저 세대론 자체를 위한 이야기일 뿐이며 중요한 것은 사회적 변화라고 말한다. 그리고 비판자들은 세대론이란 것은 결국 새로운 소비자 층을 발굴하는데 명민한 마케팅 전문가의 지적 창조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그러나 나는 세대 담론은 그 나름의 유의미가 있다고 본다. 세대 담론이 강화되는 두 가지 방향이 있다. 첫 번째는 자기예언적 실현으로, 특정 세대에 대한 지적이 본래 실체가 불분명하더라도 어떤 기표로 호명되고 이야기 되는 순간 그 세대 자신의 것으로 굳어지는 특징을 보인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세대 담론은 결국 세대 출몰에 대한 맥락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확장되기에 사회적 변동에 대한 분석들을 함축할 수 밖에 없다. 단순히 세대 설명이 아니라 사회적 변화에 대한 진단으로 논의되기에 세대 담론은 설명력이 강한 논의의 프레임이 된다. 내가 보기에 세대 담론이 지닌 유의미성은 바로 이 후자에 있다. 즉 특정한 서사를 지닌 ‘주체’를 호명함으로써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시나리오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지 살피기 위한 논의의 길라잡이로써. 



밀레니얼 세대론은 결국 바람직한 삶(good life)에 관한 질문이다

다시 이 글이 출발한 곳으로 돌아가 본다. 자기애로 충만하지만 서툰 감정의 발로도, 청춘의 치기도 아닌 어떤 내면의 확신을 보여주는 주인공들. 동시에 화려한 색감과 다이내믹한 발걸음과 펑키한 리듬은 밀레니얼의 성찰적 자기애를 남들에게 힙한 셀피로 보여주고 싶은 욕망과 공유한다. 어떤 이들에겐 이들이 종잡을 수 없고 매순간 다르게 살아가는 철부지 혹은 매번 새로운 욕망을 추구하는 매력적인 소비자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밀레니얼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 완전히 새로운 것이거나 정상성에서 벗어난 어떤 것이라 보지 않는다. 나아가 그들의 삶 또한 전통적인 근대인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최초의 근대인이라 불리는 로빈슨 크루소.


근대인의 삶은 18세기 말에 발생한 낭만주의와 개인화에서 출발한다. 내면적인 감정 표현에 주목하고 자기 앞에 주어진 일상의 삶에 자신의 창조적 자취를 남기려는 경향은 전통적인 낭만적 근대인의 표상이었다. 윤리학자 찰스 테일러는 내부 지향성, 일상적인 삶에의 긍정, 그리고 (자기 감정의) 표현주의 등을 특징으로 하는 근대적 인간을 추적하면서 그러한 특징들을 단편적으로 바라보아서는 안되고 바람직한 삶(good life)란 무엇인가라는 좀더 거시적인 지평 위에 수립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밀레니얼에 대한 우리의 시선 또한 단편적인 변화와 징후에 주목할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바람직한 삶에 대한 생각들이 변화하고 있음을 지적해야 한다. 60년대 이후 90년대까지 이어지던 서구식 자본주의 호황을 완전히 종료하고, 지금 우리는 장기화된 침체와 극단적인 양극화의 가속 그리고 전통적인 삶의 안전망이 붕괴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시대의 절망적인 구조 변동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가꾸어 나가려는 어떤 거시적 계획(한 개인에게 자신의 삶을 고찰하는 것 만큼 거시적인 주제는 없다)이라는 관점으로 밀레니얼을 바라본다면 이들은 단순히 청춘을 담보로 삼는 철부지도 아니고, 항상 새로운 것에 집착하는 소비자도 아니게 된다. 그렇다면 밀레니얼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힙한 놀이 문화나 소비 트렌드가 아니라 바람직한 삶(good life)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에 대한 성찰적 질문일 것이다. 



밀레니얼의 서사(Narrative)에도 바람직한 삶의 해답이 있을까


정말로 바람직한 삶이란 무엇일까. 주어진 틀을 완전히 벗어나 나 자신의 삶을 판돈으로 벌이는 유쾌하지만 다소 위험한 모험일까. 아니면 안전하다 여겨지는 행로를 성실하게 따라가야 하는 것일까. 밀레니얼 세대 안에서도 이 질문에 대해서 하나의 답을 만들 수 없다. 그렇지만 밀레니얼은 바람직한 삶에 관해 계속 질문하고 성찰한다. 그들은 지금도 자기 삶의 다양한 프로젝트를 창조하며 바람직한 삶의 모습을 조금씩 그려가고 있다. 



참고 자료  

<너네는 왜 그러는 거니, 밀레니얼 세대!>, 샘 파트너스 브런치

<밀레니얼 세대의 소비형태가 미국을 재구성한다>, 코트라

포스트모더니즘과 철학》, 김혜순 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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