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중한 타이포그래피가 만드는 과장된 레이아웃, 알쏭달쏭한 알레고리로 무장된 이미저리 그리고 오직 해체와 가학만을 목표로 하는 무의미한 反조형 등···
누군가 말했듯 브루탈리즘은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데 실패하기 어려운, 즉 시각적 자극을 전달하는데 가장 확실한 그래픽 기법이다. 브루탈리즘의 태생은 합리주의 미학이 가진 지루함을 폭로하고, 유려하고 매끄러운 조형 에 가려진 재료의 진면목을 외부로 드러내는 것에서 출발했다. 내가 보기엔 둘다 아름다움에 대한 헤게모니 싸움이며, 특정 시대의 미학사로 국한되기 보다는 스타일과 유행이 순환하면서 이따금 분출되는 미학의 한 전형이 아닐까 싶기도..
그렇다고 브루탈리즘을 미적 스타일로만 이해되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기성 질서로부터 은거된 자들의 마이너한 목소리와 그들의 표정을 드러내고자 노력하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메시지는 정형 그래픽으로 표현하기 어렵다. 정돈된 사용법에서 벗어나 시각 재료들을 자유롭고 과감하게 배치해야, 메시지가 가지는 소수자성, 분열성, 고유성을 온연히 드러낼 수 있다. 즉 정형성에서 벗어나면 벗어날 수록, 마이너리티의 존재감이 더 도드라지고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자국과 울림을 남길 수 있다.
이렇게 비교할 수도 있다. 브루탈리즘은 모방하기 쉽지만 시의적절하게 사용하기 어려운 반면, 합리적 조형성은 모방하기 어렵지만 일단 한번 잘 정리하고 나면 어떤 맥락이든 쉽게 녹아든다. 전자의 모방이 대개 실패하는 이유는, 비정형이 필요한 맥락의 고민 없이 해체적 뉘앙스만 반복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 어떤 전복적 스타일도 - 언뜻 보기에 추미의 쿨함은 있을지언정 - 맥락에 대한 적절한 사유와 선택이 없을 경우, 공감의 자국이 아닌 순간적 자극만 남긴다. 반대로 후자는 기존 시각 질서 안에 통용되는 문법을 얼마나 잘 지켰는지가 주요한 미학적 이슈다. 만일 주어진 조형 원칙을 충실히 따라간다면 그것이 가진 미적 보편성으로 인해, 어떤 상황에서도 잘 어울리는 특성을 가질 수 있다.
맨 위에서 짧게 묘사했듯이, 자극만 전달하는 모양새는 브루탈리즘 내부에서의 타락이다. 더 이상 충격이라 할 수 없는 반복적이고 지리한 충격 속에서, 표현만 앙상하게 남아 브루탈리즘의 껍데기가 시체처럼 널부러질 것이다. 그렇기에 브루탈리즘은 무위함, 우연, 무의식이 행하는 도박에 따라 아무렇게나 흩뿌리는 기법이 아니다. 그것은 반정립할 시각 명제에 대한 충분한 숙고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는 무작정 반대로 향하고 쿨해지기 위한 ‘자기-탈피적’ 시간이 아닌, 기존 미적 질서에 대한 자신의 관습을 철저히 깨부수려는 ‘자기-파괴적’ 시간이다. 이 시간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당연히 기존 질서에 대한 심미안을 어느정도 갖춘 상태여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 도출된 반정립의 시각적 단서들이 담겨져야 할 맥락과 메시지가 무엇인지 철저한 연구가 요구된다. 이렇게 보면 합리주의적 그래픽이든 브루탈리즘이든 그자체로 자기 완결적이고 독창성 있는 작업을 위해서, 작업자에게 필요한 태도의 깊이와 수고의 절대량은 일견 비슷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