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천하의 불효 자식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나는 그다지 모범적인 딸은 아니었다. 사실 엄마의 말을 빌리자면, "너는 항상 내 맘대로 하고 살았잖아" 라고 할 정도로 부모님의 희망을 100% 충족시킨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모님이 걱정하실 만큼, 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할 정도의 선택을 한 적은 없었다.
은연 중에 나도 부모님의 시선을 익힐 수 밖에 없었고 선택하는 데에 있어서 그 시선은 굉장히 큰 영향을 미쳤다.
이직이 아닌 퇴사를 생각하게 되었을 때 가장 처음 떠오른 건 부모님한테 어떻게 말하지? 라는 걱정이었다.
사실 그 생각을 하고 스스로도 이상했다. 나는 경제적으로 독립한 지 오래였고, 이제 물리적으로도 독립하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을 정도의 저축이 있었다. 오히려 엄마에게 주기적으로 용돈을 주고 있었고 부모님에게 더 이상 의지해야 하는 상황도 아니었다. 죄송한데 이제부터 민폐를 끼치게 될 것 같습니다....도 아니고 내 스스로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판단한 상태인데, 나는 왜 걱정부터 들었을까.
나는 무서웠다.
대기업에 갔다며 좋아하던 부모님도, 주위에서 딸 다니는 직장을 물어봤을 때 신나서 대답하던 모습도,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며 안심하던 그 모습도, 역시 넌 걱정할 일이 없다는 말들도 차례차례 떠올랐다.
백퍼센트 나에게 실망할 것이다.
나의 선택을 의심하고, 그 근거를 따지고, 회유하고, 그리고 나서는 나에게 실망했다고 할 것이다.
몇 번이고 시뮬레이션을 해봤지만 이야기의 끝은 똑같았다.
그래서 오랜 시간을 고민해야만 했다. 부모님이 나에게 실망하게 될 것이 두려워서 계속 회사를 다니는 게 과연 맞나? 나는 그렇게 독립적이지 못한 사람인가? 아니, 이제껏 신뢰해왔던 것이 그 선택 하나로 무너진다면 그게 더 문제 아닌가? 하지만 나는 부모님이 내게 실망하는 것이 무섭고 슬펐다. 내가 정말 무가치해질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평소에 내가 그다지 모범적인, 순종적인 딸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게 떠오른 저 생각들이 너무나도 의아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부모님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행복하지 않은 시간들을 이어나가야 할 때의 괴로움에 비해서, 기대치를 충족시켰을 때의 만족스러움은 너무나도 짧았다. 그리고 이대로라면 나는 나를 실망시키고, 오히려 더 힘들어졌을 때 뜬금없이 부모님 탓을 하게 될 것만 같았다.
당장 나에게 실망하더라도 나는 더 좋은 삶을 향해 노력할 것이고, 내가 행복해지면 그게 더 부모님에게도 좋은 일이 될 거라고 마음을 다잡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국 내 삶은 내가 책임져야 했다. 하루 하루를 살아야 하는 건 나였고 나는 온전히 내 마음을 따르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퇴사한 후 부모님은 내 선택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충분히 내 생각을 얘기했기 때문인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나은 반응을 보여주긴 했다. 아빠는 내가 없는 자리에서 이모와 엄마에게 분통을 터뜨렸다(고 들었다). 엄마는 네가 생각이 있어서 그렇겠지, 하며 계속 내가 아니라 엄마 자신을 설득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며칠 전 아빠가 "그만두고 난 후에 요즘은 행복하니?" 라고 물어봤다. 나는 대답 대신 거실에서 한 바퀴 춤을 췄다. 뭐, 굉장히 우울하고 힘들었지만 요즘은 대체로 행복하니까.
아마도 나는 앞으로 종종 이렇게 부모님을 실망시킬 지 모른다. 하지만 예전만큼 두렵거나 공포스럽지는 않다. 오히려 좀 더 서로에게 독립적으로, 건강하게 의지할 수 있는 길로 갈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뭐.... 안되면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