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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빈 Apr 13. 2016

옛날이 살아남는 법

연필과 연필깎이

  은색 기관차 모양의 연필깎이에 둥글게 유순해진 연필심을 밀어 넣고 드르륵, 드르륵 연필을 깎는 최에게 웬 연필이냐고 물었다. 재수를 하는 남학생인 최는 겸연쩍게 웃으면서 “수학 문제를 풀 때는 연필을 쓰는데, 금방 연필심이 뭉툭해지는 바람에 깎아줘야 하거든요.”라고 말했다. 애초에 수학 문제를 풀 때만은 왜 하필 샤프가 아니라 연필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저마다의 이유라는 게 있을 거라 생각하고 말았다. 우선은 그 드르륵, 거리는 소리가 마음에 들기도 했고 손바닥만 한 기관차의 태엽을 감는 듯, 조심스레 연필깎이의 손잡이를 돌리는 그 동작의 소탈함이 좋아서였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시간이 잠시 느려지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에만 해도, 연필은 꽤 보편적인 필기도구였다. 고학년이 되면서 한 자루에 천 원이나 천오백 원쯤 하는 제도 샤프를 많이 쓰게 되었지만, 그래도 지저분한 필통 속 한 구석에는 늘 짤막해진 연필들이 흙바닥을 뒹굴다 온 아이들처럼 누워있었다. 당시 내 연필은 아버지께서 깎아주셨는데 아버지는 연필깎이를 놔두고도 늘 커터 칼로 연필 끝을 다듬어주셨다. 어릴 때에는 아버지의 연필 깎는 그 모습이 어른스러움의 대명사처럼 여겨져서 혼자 커터 칼로 연필을 깎다가 끝도 없이 연필이 짧아져버리거나 손끝을 베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사실 보편적인 필기도구로서 연필의 입지는 굉장히 좁아졌다. 샤프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볼펜이나 형광펜도 썼다 지울 수 있는 것들이 있으니 구태여 연필을 쓸 합리적인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연필은 지나치게 번거롭고, 소모적이다. 그런 이유로 요즘은 무슨 한정판이라든가, 고급 나무로 만들었다든가 하는 이유로 연필의 비합리적인 고급화 전략도 만연한다.


  그런 연필이 어쩌다가 여태 살아남아, 누군가에 의해 뾰족해졌다가 뭉툭해지는가. 실용적인 이유로만 보자면, 아마도 샤프가 아닌 연필로만 구사할 수 있는 이미지의 영역 때문일 것이다. 쓸수록 닳아 뭉툭해진 연필심의 질감으로부터 번지는 은근한 명암과 그 명암이 주는 아련함 같은 느낌. 아마도 그림을 그리거나 할 때에 연필은 샤프에게는 없는 흔적, 그림자 같은 생명력을 불어넣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편지 한 장, 수학 문제 하나 미처 다 써 내려가기도 전에 글씨를 흐리게 하는 연필이 왜 여전히 필기도구로 쓰이는가. 심지어 유별난 몇몇 사람들은 연필에 애착을 갖기도 한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아무것에나 막 가져다 붙이는 흔한 '감성' 때문인가. 슥슥, 종이 위를 스치는 소리나 나무 몸통의 온도 같은 것들. 백일장을 가면 나눠주는 칸칸의 원고지처럼 아날로그, 옛날 따위에 대한 문학적 오마쥬 같은 것일까.


   한 뼘 길이로 태어나 손가락 한 마디까지 짧아지는 연필의 한 생이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이치를 따른다. 그것은 앞서 말한 대로 불편하고 번거로운 이치다. 굳이 그렇게까지 헌신적일 필요가 있냐는 것이다. 굳이 온몸으로 할 말해가며 닳아 없어질 필요가 있냐는 것이다. 매끈하고 튼튼한 샤프는 제 몸통 온전히 보전하면서 세치 혀를 내밀듯 검은 샤프심을 뽑아 식식, 할 말 다하는데 연필은 무엇 때문에 융통성도 없이 온몸 던져가며 발언하는 것인가.


  그런 이유로 나는 연필에게 더 동질감을 느낀다. 그 동질감은 나라는 사람이 가진 개별적인 특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한 존재에 관한 것이다. 진심을 전하기 위해 전력투구하는 그 모습이라든가, 잔인하지만 공평한 생과 사의 사이클을 따르듯 쓰면 쓸수록 닳아가는 생명력이 그렇다. 뿐만 아니라 날카롭고 또렷한 초심을 기억하기 위해 제 몸 깎는 고통을 견뎌내야 하는 존재의 불완전성과 합리적인 이유 없이도 사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연필은 샤프보다 인간적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어제보다 늙어있거나 닳아있기 마련이다. 샤프심 한 통을 산 듯 상대방의 마음을 꿰어내려 잘 빠진 세련된 말들을 전문가처럼 뽑아내는 위선자들이 가끔 있다. 한참을 썼다 지우며 애태우느라 닳아 뭉툭해진 당신의 투박한 말은, 그러나 쉽게 부서지는 샤프심의 그것보다 단단한 진심 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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