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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빈 Apr 11. 2018

봄볕 아래 고양이

이혜경 - 봄은 고양이로다

오늘은 날씨가 정말 온화해서, 카페가 아닌 학교 캠퍼스 솔숲(요즘은 노르웨이 숲, 줄여서 ‘노숲’이라고 부르더라.)에 앉아서 책을 읽었다. 무성한 나뭇가지와 잎을 헤치고 바닥에 닿은 봄볕은 너무 밝지도, 너무 뜨겁지도 않아서 독서하기에 더없이 좋았다. 주변 소음이 적당한 야외에서 하는 독서의 가장 큰 장점은 눈으로만 글을 읽지 않고, 낭독할 수 있다는 거다. ‘낭독’이라고 하면 무슨 ‘시 낭독회’처럼 무게 잡고 읽는 걸 떠올리기 쉽지만, 그런 건 전혀 아니고 그냥 말 그대로 소리 내어 읽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여러 작가들의 글을 낭독해보면, 문장의 완급이라든가 작가 특유의 어미, 문체, 호흡 같은 걸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대사 부분이 나오면 나도 모르게 캐릭터에 맞는 말투를 내보기도 하고, 즐거움이나 슬픔의 문장을 읽을 때면 자연스럽게 표정이 활짝 펴졌다가 일그러지기도 한다. 


거짓말처럼 골라 펴는 페이지마다 마음에 쏙 드는 산문들뿐이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책을 읽었다. 목이 건조해지면 돌집(워커하우스라고 적혀 있지만, 돌집이라고 부른다.) 카페에서 테이크 아웃한 차가운 밀크티를 마셔가면서 읽었다. 쓸쓸한 글도 있었고, 시트콤처럼 재밌는 글도 있었지만, 오늘 읽은 글 중 가장 오늘과 어울리는 글은 소설가 이혜경의 산문 <봄은 고양이로다>였다. 


대학교 캠퍼스, 봄볕 아래에서 책 읽는 즐거움


7남매의 팍팍한 생계를 꾸려내던 작가의 엄마가, 출산 직후 명을 다한 어미 고양이 대신 아기 고양이들을 보살폈던 기억에 관한 글. 다른 형제들이 모두 곤한 잠에 빠져 있던 새벽, 어미젖이 고파 낑낑 대는 아기 고양이들을 위해 잠을 줄여가며 우유를 먹이던 엄마, 그리고 그 옆에 있던 작가. 작가는 ‘마치 엄마와 단 둘이 있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그 순간들을 기억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부드러운 털 한 겹 아래 오톨도톨 만져지는 고양이의 가는 뼈가 금세라도 바스라질 것 같아 마음 조이면서도 나는 행복했다. 나는 엄마와 단 둘이 깨어 있는 것이다. 식구가 많은 집안인데다 아버지의 일까지 거드시느라, 내가 엄마를 차지할 수 있는 기회는 아주 적었다. 어쩌면 내가 졸린 눈을 비비면서 밤마다 반짝 일어난 것은 아기 고양이에 대한 안쓰러움이나 엄마를 거들어드리겠다는 대견스러운 생각에서라기보다는, 엄마를 온전히 독차지한다는 기쁨 때문일지도 몰랐다.

<나는 천천히 울기 시작했다> 209page」


아기 고양이들은 어미를 잃었고, 그 덕에 작가는 연약한 어느 새벽마다 온전히 엄마를 독차지 할 수 있었다. 물론 그건 고양이든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한 생명을 보듬는 ‘엄마의 정성’ 덕분이었고. 


이 글을 낭독하다가 나도 모르게 너무 행복해져서 입술을 앙 다물고 웃을 수밖에 없었던 장면이 있다. 아기 고양이들은 정말 작은 한 줌의 존재들이라, 우유병 젖꼭지도 너무 커서 우유를 찻숟가락으로 일일이 떠먹여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작가의 엄마가 약국에서 아기 고양이도 빨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젖꼭지가 달린 우유병을 구해 오신다. 그걸 구해서 들고 오던 엄마의 표정을, 작가는 이렇게 표현한다. 


「…늘 무표정에 가깝게 덤덤하던 엄마의 얼굴에 그렇게 천진하게 떠오른 득의라니. 그때 엄마의 얼굴은 난분분 떨어지는 복사꽃잎처럼 환했다.…

<나는 천천히 울기 시작했다> 210page」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얼굴을, 나는 마치 당장 본 것만 같아서 글을 읽다 말고 행복만큼 따뜻한 콧김을 뿜었다. 아마 나보다는 작가가, 작가보다는 아기 고양이들이, 그리고 그때의 아기 고양이들보다는 누구보다도 작가의 엄마가 가장 행복했으리라. 사랑하는 존재를 위해 기꺼이 뭔가 할 수 있다는 것만큼 행복한 건 없으니까. 


글을 다 읽고 나니 문득 고양이에 관한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고등학생이던 동생 경인이가 하굣길에 대뜸 아기 고양이를 데리고 온 적이 있었다. 제대로 먹질 못해 도망갈 여력도 없이 길가에서 너무 애처롭게 울고 있던 아기 고양이를, 한참 지켜봐도 어미도 찾아오지 않는 아기 고양이를 도저히 그냥 지나치기는 어려웠다고 말하면서. 한창 비속어를 일상어처럼 써대고 덩치가 나보다도 더 큰 고등학교 남학생이라도, 여리고 나약한 것 앞에서는 여리고 나약한 마음이 드는 법인가 보다. 


사정이 딱한 그 아기 고양이를 그냥 내치는 것도 매정하지만, 아무튼 당시 오래된 6층짜리 아파트에 살던 우리 가족이 아기 고양이를 온전히 책임지는 것도 무리였다. 더군다나 개나 고양이 만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엄마는 더 질색을 하셨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 아기 고양이에 비하면, 우리 가족은 베풀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은 입장이었다. 야밤에 아파트 분리수거장으로 가서 쓸 만한 박스와 신문지를 챙겨 왔고, 고양이를 먹일 우유와 소시지를 사 왔다. 그렇게 베란다 한쪽에 허접한 보금자리를 만들어 놓고 잠든 사이, 새벽 내내 가족들은 화장실 간다는 핑계로 다들 한 번씩 베란다의 아기 고양이를 살폈다. 예상했겠지만, 가장 질색하던 엄마가 가장 애살맞게 아기 고양이를 챙겨주셨다.


그렇게 한 사나흘이 지났던가. 외출하고 돌아온 집에서 엄마는 굉장히 분한 표정으로 저녁을 준비하고 계셨다. 환기시킬 겸 열어둔 현관문으로 아기 고양이가 인사도 없이 떠나버린 것이다. 다만 며칠이라도 길에서 오들오들 떨던 저를 거둬서 먹이고 재워준 정이 있는데, 손길 한 번 허락해주지 않다가 먹고 살만 하니 쌩 하고 떠나버렸다고. 내가 이래서 강아지는 좋아해도 고양이는 싫어한다고. 양파를 써는 엄마의 칼질에 양파와 함께 서운함도 썩둑썩둑 잘려 나갔다. 그날 저녁 식사를 하고 나서, TV를 보던 엄마는 “그래도 우리 집에서 워낙 잘 먹어서 나가서는 잘 살겠지. 잘 살아야지 배은망덕한 고양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엄마라는 존재는 그렇게, 늘 마음의 끝자락에 걱정을 달고 산다. 


솔숲에서 책을 다 읽고 멍하니 캠퍼스 풍경을 바라보다가, 대학 본관 뒤쪽의 정원에서 낮게 누워 쉬는 고양이를 발견했다. 누런 빛깔 몸통에 옅은 줄무늬가 있는, 누운 그 자리가 마치 제 지정석인 듯 편안하게 눈까지 감고 있는 고양이. 이장희 시인은 동명의 시 <봄은 고양이로다>에서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고운 봄의 향기(香氣)가 어리우도다”라고 했는데, 정원에 누운 고양이가 그 시의 한 장면 같았다. 


봄볕 아래 고양이를 보면서, 봄을 닮은 고양이를 보면서, 나도 고양이에 대해 봄처럼 온화해져도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입장에선 얼마든지 서운하고 배은망덕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고양이에겐 또 고양이의 사정이 있었겠지. 잊고 있던 약속이 떠올랐거나, 베란다 밖으로 자기를 찾는 어미 고양이의 애타는 울음을 들었거나. 아무튼 그 예전 인사도 없이 떠났던 아기 고양이도, 무럭무럭 건강히 자라서 저기 낮잠에 든 고양이처럼 양지바른 봄볕 아래에서 편안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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