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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빈 Apr 17. 2019

수상 소감 연습

연습 말고 실전은 언제.

내가 했던 말도 안 되는 짓들 중 하나는 바로 ‘수상 소감 연습’이다. 감히 ‘무의식’을 변명거리로 써도 된다면, 무의식 중에 했던 짓이라고 해두자. 


군 제대 후 한창 노래에 빠져 있을 때, 때마침 세상은 그야말로 노래 오디션 프로그램의 광풍이 몰아치던 중이었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M방송사의 오디션 프로그램에 응시했고 2차 예선에서 깔끔하게 탈락했다. 그러니 당연히 TV 출연은 하지 못했는데, 지금에 와서 내 가창력을 고려해보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하마터면 전국적인 우세를 당할 뻔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당시 1차 예선을 통과한 나는 벌써부터 우승 수상 소감을 연습했다. 다들 아시다시피 1차 예선이라는 건, 그러니까 실력의 문제라기보다는 실천의 문제이기 때문에 응시만 하면 거의 다 통과하는 일종의 절차일 뿐이었는데도 그랬다. 연습했던 내용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너무 부끄러워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이겠지!) “부모님과 아름이와 친구들에게 감사하고, 앞으로 좋은 노래로 보답하겠다.”는, 식상한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때를 기억해보는 것만으로도 자괴감이 밀려온다. 왜 그랬을까, 나는. 동네 코인 노래방에서도 못 비빌 미천한 노래 실력을 가지고서.


본격적으로 작가가 되어 보겠다며 국어국문학과로 전과하고, 닥치는 대로 각종 문학 공모전에 응모할 때에는 매번 당선 소감을 연습했다. 한창 도서관에서 이상 문학상 당선집이라든가 신춘문예 당선 작품집 같은 것들을 빌려서는 작품보다도 당선 소감을 먼저 찾아 읽으며 자격지심을 키우던 때라, 어리석게도 나 또한 응모작보다 당선 소감에 공을 들였던 것 같다. 그러니 원하던 대로 당선될 리가 만무. 정작 운 좋게 받은 2번의 대학 문학상의 당선 소감은 무엇이라고 적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분명 연습한 대로 적지 못했을 것이다. 바보 천치 같으니라고. 


특히 신춘문예에 당선되면 소감에 꼭 적겠다고 생각한 문장이 있었다. “저는 이미 여러 번 낙선했고 여전히 시는 어렵지만, 글을 쓰는 것이 좋습니다. 멋진 문장 대신 솔직한 문장으로 소감을 전합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다른 이의 수상 소감을 읽을 때마다 너무 유려하고 아름다운 문장들이 질투가 났던 건지, 오히려 심심하다 싶을 정도로 담백하게 적겠다고 치기를 부린 것이다. 당연히 신춘문예 당선 소감은 아직 적지 못했다. 앞으로도 적을 일이 없을 듯하고. 


그 이후로는 구체적인 수상 소감을 연습한 적은 없다. 매년 연말에 방송되는 시상식을 볼 때면 ‘나도 저 정도 소감은 말할 수 있겠는데’하는 허튼 생각을 할 뿐이다. 이쯤 되면 무의식 중에 하는 짓이 아니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철저히 계산된 욕망에 의해 몸에 익은 고약한 버릇이랄까.


그러다 얼마 전, 나의 글을 정성스럽게 읽고서 책을 내자고 하는 출판사를 만났다. 지금도 원고를 더 쓰거나 퇴고하고 있다. 어느 원고든 각별하긴 마찬가지이지만 아니나 다를까, 요즘 가장 어려운 글은 바로 프롤로그다. 이것도 결국 일종의 수상 소감 같은 것인데 어떤 연유로 이 책이 세상에 나왔고, 어떤 글들을 실었으며, 어떻게 읽히길 바란다는 내용들이다. 그리고 덧붙는 thanks to. (요샛말로 Shout out to.) 이 지긋지긋한 소감 집착증이라니. 


가장 기쁜 순간에 말할 소감을 연습하는 일은 분명 낯부끄러운 점이 있지만, 가장 최악의 순간에 내뱉을 변명이나 고해성사를 연습하는 일보다는 덜 괴롭지 않겠는가. 적어도 상상의 나래 속에서 나는 늘 행복하게 웃고 있었으니까. 


노래 오디션 대회 우승 소감이나 신춘문예 당선 소감은 초라한 연습에 그쳤지만, 감사하게도 출간될 책의 프롤로그만큼은 실전이다. 드디어 나의 수상 소감 연습이 빛을 발하는 순간! 그렇게 생각하면서 프롤로그를 썼다 지우고, 썼다 지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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