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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빈 Apr 22. 2019

부적의 효험

자유로울 수 있을 때 발휘되는

부적의 효험


사주나 관상, 신점 따위에는 언제나 마음이 동한다. 손금이나 타로 카드는 물론이고 하다못해 ‘오늘의 운세’마저도 솔깃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런 관심에 비해 내 실적은 미미하다. 타로 카드는 아름이와 부산대학교 근처에서 한 번 점쳐봤을 뿐이고, 사주 또한 국장님 추천으로 벡스코 근처 역학원에 다녀온 것이 전부다. 허름한 골목마다 꼭 몇 분씩 계시던 동자님이나 선녀님 댁에 들러 신점을 보는 상상은 자주 했지만 이상하게도 발길이 내키지는 않았다. 


그러니 부적을 써봤을 리 만무한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부적 비슷한 것을 꽤 오랫동안 예전 지갑에 품고 다녔던 적이 있다. 그 시절엔 그걸 딱히 부적이라고까지 생각하진 않았지만.


공군임에도 비행기를 실제로 볼 수 없는 산꼭대기 미사일 부대에서 복무했던 스물하나의 나는 소위 군번이 꽤 꼬인 편이었다. 고장 난 태엽 인형처럼 경직된 이등병이 꽤 빠릿빠릿한 일병이 되고 나서도 후임이 없었다. 겨우 한두 명 들어온 뒤로도 로테이션 근무를 하는 헌병 특성상 수시로 막내의 역할은 내가 도맡아야 했다. 하지만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가는 법. 태풍에 떨어지는 낙과처럼 우수수 말년 병장들이 제대하면서 비로소 내게도 든든한 지원군들, 파릇파릇한 신병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후임이 많다는 게 꼭 좋은 일도 아니었지만 막내 생활을 청산한다는 기쁨에 들떠 그런 건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총 17명 정원의 헌병반에서 중간 즈음의 위치에 이르게 되니 확실히 군생활이 편해지긴 했다. 그렇다고 후임들에게 모조리 일을 떠넘겼던 것도 아닌데 (물론 이 부분은 내가 아니라 당사자인 후임들의 증언이 필요하겠지만) 같은 일을 해도 마음이 편해 그런지 수월하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몇몇 후임과는 인간적으로 친밀감을 느끼기도 했는데, 그중 J라는 친구는 유별난 구석이 있었다.


체격은 작지만 짙은 쌍꺼풀과 부리부리한 코에서 얼핏 카리스마가 느껴지는가 싶었는데, 헌병반 사무실에서 장기자랑이랍시고 한 것은 엉뚱하게도 ‘가짜 중국어’였다. 왜 예능 프로그램에서 개그맨 이수근 씨가 자주 했던 거 말이다. 알고 보면 문법이고 단어고 죄다 엉망진창인데 꼭 진짜 중국어를 통달한 사람처럼 말하는 기술. 그 J라는 친구는 장담하건대 이수근보다 잘했음 잘했지 절대 어설프지 않았다. 심지어 처음 가짜 중국어를 시연했을 때, 사무실에 앉아있던 열댓 명의 병사와 두 명의 간부 어느 누구도 그것이 가짜라고 의심하지 못했을 정도니까. 


J의 기이한 특기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동양적인 그림에 소질이 있었는데 특히 달마대사를 잘 그렸다. 그림을 복기하며 따라 그리는 수준이 아니라 자신만의 스타일이 확고했는데, 어찌나 많이 그려본 건지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일필휘지로 A4용지 위에 달마대사를 소환해냈다. 볼썽사납다 못해 애처로운 춤사위나 성대모사, 그것도 안 되면 아는 누나까지 끌어들이며 선임들 눈 밖에 나지 않으려는 보통의 후임과는 달리 J는 가짜 중국어와 달마대사만으로도 헌병반 ‘인싸’ 대열에 낄 수 있었다.


바로 그 J가 나의 제대 선물로 준 것이 부적이었다. 용하다는 무당에게서 돈 주고 써온 부적이 아니라 자기 손으로 직접 그려낸 부적. 어디서 구했는지 부적에 어울리는 유들유들하면서도 질긴 종이 위에 빨간색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그린 것이었다. 어찌나 공을 들였는지 나처럼 무속에 무지한 사람은 진짜 부적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김경빈 뱅장님, 이 부적이 만사형통하게 도와줄 겁니다.” 능글맞은 표정으로 건네는 걸 지갑 가장 깊숙한 곳에 접어 넣고는 나도 모르게 마음 한 구석이 든든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민간인이 된 스물셋. 그 이후로 J의 부적이 효험이 있었느냐고? 글쎄, 솔직히 말하면 부적을 지니고 다닌다는 사실조차도 잊고 지냈다. 때문에 다 지나간 세월을 되짚으며 좋았던 일들만 골라내면 부적 덕이라 할 것이고, 불쾌했던 일들만 골라내면 그 또한 부적 탓이라 할 수밖에. 아무튼 그 모든 날들에 J의 부적이 함께 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다 스물여덟 즈음에 새 지갑을 사면서 쓰던 지갑은 옷장 구석에 처박히게 됐다. 늘 쓰는 카드 두어 장과 신분증만 새 지갑으로 옮겼다. 각종 명함과 쿠폰, 로또 용지 따위들은 모두 옛 지갑 속에 둔 채로 몇 년을 잊고 지냈다. 그러다 최근에 이사를 하고서 문득 생각이 나 그 지갑을 들춰봤는데, 무슨 영문인지 J의 부적이 없었다. 실수로 빠질만한 곳에 넣어 두진 않았는데. 혹시 은연중에 낙첨된 로또 용지와 함께 내다 버린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효험이 다 되어 공기 중으로 사라진 건가.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지갑 속 부적이 사라진 것만은 확실했다. 


지금이라도 J에게 연락할 수야 있지만 다시 부적을 써달랄 수도 없고, 이제 서른을 넘긴 J의 기운이 스물둘과 같을 것이라 보장할 수도 없다. 아무튼 우리는 부적 따위에 온전히 운명을 내맡길 처지가 아니면서도, 때로는 부적 따위가 간절해지는 처지를 살아내는 중이니까. 더 이상 제대하는 선임에게 공들인 부적을 그려주던 순수한 열정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지갑 속 J의 부적이 사라진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낡은 지갑을 뒤적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것이 바로 부적의 효험이다. 지니고 있으면서 제액초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끝내는 부적 없이도 무탈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이 바로 부적의 효험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사다리처럼 부적 또한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때 진짜 효험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J의 부적은 참으로 신통방통하다. 


여태 그래 왔듯, 앞으로의 삶에도 돈 주고 부적 쓰는 일은 없을 듯하다. 무당이 금전의 대가로 쓰는 부적이 스물둘 일병이 제대하는 선임에게 선물로 쓴 부적보다 지극정성일 것이라고 여길 구석이 없다. 무엇보다도 J의 부적보다 효험 좋은 부적은 아마 찾기 힘들 것 같다.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부적, 그 효험으로 남은 삶을 살아가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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