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괜찮다.
며칠 전 대학 선배 L이 ‘토요일 아침에 목욕탕 다녀온 이야기’를 해줬다. 별 대수롭지도 않은 내용이었는데 어찌나 마음이 평온해지던지. 선배의 경험담에 약간의 상상력을 보태서 이 글을 쓴다. 읽는 모두에게 그 평온함을 전하고 싶어서.
L 선배에게는 목욕탕에 관한 나름의 지론이 있다.
목욕탕을 이용하는 동안은 온전히 혼자가 되는 것.
해서 목욕탕에 갈 때만큼은 누구와도 동행하지 않는다. 소지품도 최소화한다. 스마트폰은 집에 두고 지갑의 부피마저도 덜어낸다. 비누와 치약, 수건에 샤워타월까지 비치된 남탕에 목욕 바구니는 사치다. 가볍고 헐렁한 바지 주머니에는 목욕비 몇 천 원과 일회용품을 살 정도의 잔돈이면 충분하다. 가능하면 맨발에 슬리퍼 따위를 신고, 걸어서 동네 목욕탕으로 향한다. 비가 내리면 그것도 나름대로 운치 있겠지만, 요즘 같은 봄날엔 아무래도 화창한 햇살과 온화한 바람이 제격이다.
자, 이제 목욕탕에 도착한다. 안녕하세요. 한 명이요. 샴푸하고 바디샤워 하나씩 주세요. 카운터에 앉은 주인아저씨와 대충 그런 대화를 주고받은 뒤 본격적인 묵언에 돌입한다. 목욕을 끝내고 귀가할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것이다. 동행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계단을 올라 커다랗게 ‘남탕’이라고 적힌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면 습한 공기에 섞인 비누 냄새와 구두약 냄새. 한쪽 구석의 TV에서 흘러나오는 스포츠 중계 소리와 목욕탕 이발소의 바리깡 소리. 헤어드라이어 모터 소리와 벽걸이용 선풍기의 풍량을 조절할 때 나는 딸깍 소리, 구운 계란 껍질을 평상에 내리치는 소리까지. 그 모든 소음들이 더할 나위 없이 조화로운 곳에서 묵묵히 탈의를 하고 목욕탕으로 들어선다.
희뿌옇고 습한 온기가 가득한 곳. 아무 말 없이도 온탕과 냉탕의 밀담 같은 공명이 울리는 곳. 그런 곳에서 샤워를 하고, 탕에서 몸을 불리고, 샤워타월로 묵은 때를 벗긴다. 건식 혹은 습식 사우나에서 온몸의 땀구멍이 열릴 때까지 앉아있다 나와서 차가운 물로 몸을 씻어내는 상쾌함이란. 겨울도 다 지난 김에 냉탕 폭포 버튼을 눌러 어깨와 등을 마사지하거나 여유로운 잠영을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리고는 목욕탕 한 구석에 마련된 원적외선 쉼터에서 잠시나마 곤한 잠에 든다. 완전한 나체 상태로 적당한 높이의 목침을 베고 누워서 눈을 감는다. 목욕탕, 그중에서도 남탕이 아니라면 어디에서도 불가능한 그야말로 태초의 잠이다. 한국에는 누드비치는 없지만 남탕의 원적외선 쉼터가 있다. 길어봤자 30분 내외의 시간, 샤워타월로도 다 씻기지 않았던 한 주의 고단함이 잠결에 빠져나간다.
다시 탈의실로 나와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비치된 스킨로션을 바른다. ‘CHARACTER' 라든가 'QUENAM' 같은 상표가 적힌, 이름은 달라도 향은 다 비슷한, 집에서라면 절대 쓰지 않을 그런 스킨로션을. 선풍기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동시에 헤어드라이어의 뜨거운 바람으로 머리를 말린다. 면봉으로 귓속 물기까지 닦아내고 나면 로커에 넣어뒀던 옷을 주섬주섬 다시 꺼내 입는다. 애당초 바지 주머니에 챙겨 온 현금은 이미 다 썼으니 바나나 우유 대신 정수기 냉수로 갈증을 해소한다. L 선배의 목욕탕 코스는 금욕과 침묵이 포인트다.
그렇게 한결 개운해진 심신으로 목욕탕 건물을 나선다. 왔던 길을 그대로 걸어서 집으로 향한다. 벗겨낸 묵은 때라고 해봤자 무게를 가늠할 수도 없을 만큼 미미하지만 발걸음만은 훨씬 가볍다. 일주일 내내 짊어온 현실의 무게를 꽤 덜어낸 덕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계절은 봄이고 오늘은 토요일. 시간은 이제 겨우 정오를 향하고 날씨는 화창하다. 불쾌하지 않을 정도의 허기가 식욕을 돋우고, 집에 도착하면 스마트폰에는 반가운 소식들이 들어와 있을 테다. 싸구려 스킨로션 냄새마저도 그런대로 상쾌하다. 허밍이나 휘파람이 잘 어울리는 귀갓길이다. 이 정도면 주말의 시작으로는 손색없다. 이번 주도 치열하고 바쁘게 보냈다. 목욕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L 선배는 생각한다.
천천히 걸어도 된다.
주말에는 천천히 걷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