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경빈 Oct 15. 2019

지루하지 않다, 전혀

인생은 클라이맥스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니까.

지루하지 않다, 전혀


나의 학창 시절을 관통했던 몇 가지 키워드 중 단연 최고의 비중을 차지하는 건 노래다. 컴퓨터 게임에는 소질도 흥미도 없었고 글 쓴다는 놈 치고 다독가는 아니었다. 무리 지어 다니면서 누굴 괴롭히지도 않았고 그런 무리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적도 없었다. 학생의 본분이라는 공부는 시험 기간에만 바짝 붙들었고, 치기 어린 연애사는 중2 무렵부터 간간히 이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노래만큼은 학기와 방학을 가리지 않고, 주야도 가리지 않고 계속 해댔다. 심지어는 교실에서도 소음 공해를 일으키는 것이 일상이라 친구들에게 자주 타박을 받기도 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그 시절의 친구들에게 이 글을 빌려서나마 다시 한번 사과하고 싶은 지경이다. 


아무튼 초등학생 졸업 즈음까지 전국적인 록 열풍이 불었기 때문에 나 또한 생목을 쥐어짜 내며 고음을 내기 위해 노력했다. 야다의 이미 슬픈 사랑, 얀의 그래서 그대는, 김상민의 You, 활 밴드의 Say Yes 그리고 김경호와 스틸하트까지. 노래연습장에서 뻔한 레퍼토리와 뻔한 음이탈을 구간 반복하던 시절이었다. 


중학생이 된 뒤로도 한 동안은 록에 빠져 지냈는데, 당시로서는 또래에 비해 음악적 취향이 선구적이었던 J라는 친구를 통해 힙합과 R&B를 알게 되었다. 드렁큰 타이거와 다이나믹 듀오, 브라운 아이즈와 문명진과 앤, 박효신, 김범수 등등. 록만 듣던 내게는 신세계였다. 가수는커녕 가수 지망생도 아니었지만 장르를 단박에 갈아타는 게 어쩐지 록 스피릿을 배신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루비한 멜로디와 화려한 기교, 찰떡 같이 비트와 맞아떨어지는 라임과 플로우의 세계는 도저히 외면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그때의 취향이 이십 대 중반까지도 이어져서 거의 10년 넘게 나의 플레이 리스트는 힙합과 R&B로 도배되어 있었다.


그 시절 내 음악 감상의 목적은 ‘전율’이었다. 록의 샤우팅과 고음, 힙합의 숨넘어갈 듯한 랩핑과 R&B의 멀미날 듯한 기교 같은 것들. 최고 지점에서의 낙하를 고대하는 롤러코스터 탑승객처럼, 곡의 클라이맥스 부분만을 기대하며 재생 버튼을 눌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음악 감상이라기보다는 어느 경지를 넘어선 현상에 대한 일종의 동경이자 쾌락이었던 것 같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일이 지속되면 결국 그것을 잘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욕심. 록의 시대에 나는 김경호나 스틸하트가 되고 싶었고, 힙합과 R&B의 시대에는 개코와 나얼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여지없는 김경빈이었고 딱히 노래에 재능은 없었다. 지금은 부단한 노력으로 음치는 겨우 탈출했지만 당시의 내 가창력은…(말줄임표로 대신하겠다.) 그런 이유로 학창 시절의 나는 들으며 감탄했고 부르며 좌절했다.  


그런 나의 음악 취향은 이십 대 후반 즈음부터 달라졌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거나 꾸준한 노력으로 성취해낸 것은 아니었다. 문득 정신 차려보니 내 플레이리스트의 장르는 중구난방 뒤죽박죽이 되어있었다. 이문세와 김광석에 이어서 선우정아와 혁오 밴드와 아이유가 이어진다. 윤종신의 곡들이 줄줄이 있다가 갑자기 1960년대 영국 밴드인 The Animals의 ‘The House Of Rising Sun'이 거친 록 사운드를 드러내고, 바로 뒤이어 Bill Evans의 ’Walts for Debby'가 잔잔하게 흘러나온다. 누구나 다 아는 대중적인 가수의 곡들 사이사이에 Western Kite, 이예린, 안녕의 온도, 사뮈의 곡이 끼어있다. 


물론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어졌다거나, 고상한 취향이 생겼다거나, 남들이 잘 모르는 아티스트를 혼자만 아는 즐거움을 누린다거나 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저 맘에 드는 것들을 마구잡이로 듣다 보니 정체성 불분명한 음악 보따리가 생겼을 뿐.


그런 와중에 한 가지 공통점을 찾아냈는데 거의 모든 곡들에 ‘경이로운 클라이맥스’가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저마다 곡 자체의 기승전결은 있겠지만, 그러니까 스틸하트의 샤우팅이라든가 나얼의 10단 꺾기 같은 ‘탈 인간’ 수준의 클라이맥스는 없었다. 심지어 이예린이나 안녕의 온도, 사뮈의 곡 중 몇몇은 음역대로만 보면 화창한 봄날의 호수 위 일렁이는 물결 같아서, 아마 학창 시절의 나였다면 지루해서 1절도 다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나이 서른을 넘기며 삶이라는 건 결국 일상의 연속이며 그 일상들은 경이로운 클라이맥스가 아니라 잔잔한 걸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된 것이다. 심지어는 평생에 ‘그런 클라이맥스’가 한 손에 겨우 꼽을 만큼일 수 있다는 것도. 클라이맥스만을 위해 살기에 우리의 삶은 너무나도 평범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고 나니 노래 한 곡을 듣더라도 클라이맥스가 아니라 전체적인 분위기나 가사, 목소리에 집중하게 되었다. 무슨 얘길 하는지, 어떤 감정인지, 그 한 곡의 노래가 지금 이 순간의 내 일상을 어떻게 극적으로 만들어주는지. 맥락 없는 경이로움보다 담담하게 이어지는 멜로디가 더 감동적이고, 화려한 기교보다 가사 끝에 남은 떨리는 호흡이 진한 여운을 남겼다. 결국 소름 끼치는 전율 없이도 행복해지는 법이 선곡에도 영향을 미쳤던 게 아닐까.

물론 지금도 가끔은 나얼이나 Stevie Wonder의 곡을 찾아 듣는다. 일상이 워낙 잔잔하니 노래를 통해서라도 클라이맥스를 느껴보려고. 하지만 이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나이가 됐다. 아주 평범하고 잔잔하고, 심지어는 지루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 모든 일상들이 전혀 지루하지 않다고. 소중하다고. 그 일상의 조각들이야말로 나의 8할이라고. 


이예린의 ‘바다가 되고 싶어요’를 들으며 청소기를 돌리고, 냉장고에서 어제 만든 계란장을 꺼내 소박한 점심을 차리면서 말한다. 지루하지 않다, 전혀.      

작가의 이전글 저렇게 혹은 그렇게 말고, 이렇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