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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빈 Oct 15. 2019

비빌 언덕

감사합니다, 할머니.

비빌 언덕


스물넷, 전역 1년 후에 동네 24시 할인마트에서 일을 한 적이 있다. 처음엔 야간 캐셔였는데 사장님 내외의 신망을 얻으며 점차 역할이 늘어갔다. 때때로 주간 캐셔도 하고, 재고 정리도 하고, 야채 소분도 하고, 가까운 곳은 손수 배달도 했다. 오토바이는커녕 자전거도 제대로 탈 줄 몰랐지만, 게다가 푹푹 찌는 여름이었지만, 당시의 나는 혈기왕성했다. 


하루는 걸어서 10분 거리에 배달이 들어왔고, 꽤 무거운 것들이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자질구레한 생필품과 수박 한 통, 그리고 20kg 쌀 한 포대. (그래, 수박과 쌀이 포인트였다.) 어릴 적부터 쏘다녀서 만만하게 봤던 거리는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어릴 땐 기껏 해봐야 어깨에 책가방 둘러멘 것이 전부였으니까. 두어 번 장거리를 길바닥에 내려놓고 쉬어 가야 했다. 그렇게 땀을 뻘뻘 흘리며 도착한 4층짜리 낡은 건물. 당연히 엘리베이터는 없었다. 얼차려를 받는 기분으로 4층까지 계단을 오르자, 순간 두통이 느껴지는 듯한 진한 향내. 그곳은 신점을 보는 무당집이었다.


입구에 계시던 남자분이 배달된 것들을 확인하고 받아 드는 동안, 안쪽에서 누가 봐도 무당처럼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나오시더니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기에 눌려 시선을 피하는 내게, 그 무당 할머니는 "잘 살겠구만.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고마 살면 되는 기야. 니는 잘 살겠어." 하시고는 다시 슥 들어가버렸다. 예언이라기엔 성의 없고, 덕담이라기엔 의미심장한 목소리. 짐을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할인마트로 돌아가는 길, 나는 그 말을 몇 번이고 되새겼다. 잘 산다. 나는 잘 살 것이다.


당시 할인마트 일은 전역 후에 복학을 했다가 3주 만에 다시 휴학을 하고서 본가로 내려와 시작한 것이었다. 때마침 대학 문학상을 하나 받았고, 나는 대작가가 될 것이라는 착각에 빠졌고, 하필이면 혈기왕성한 탓에 대뜸 국어국문학과로 전과를 결심했다. 그렇게 군 휴학 직후 3주 만에 다시 전과를 위해 일반 휴학을 하는 괴상한 짓을 해버렸다.   


국어국문학과 학생으로 복학을 하면서 할인마트 일도 그만두게 되었다. 비로소 대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모든 강의가 재미있었고 매주 주어지는 과제가 글쓰기라는 것이 행복했다. 그렇게 1년, 2년, 3년... 처음의 열정은 사그라지고 작가로 성공할 것이라는 내 예상은 로또번호처럼 보기 좋게 빗나갔다. 졸업 즈음해선 우울증과 불면증 증세까지 앓았다. 학원 강사로 일을 하고 있었고 그 후로도 운 좋게 몇 번의 문학상을 받았지만, 등단이라든가 출간은 여전히 요원했다. 남들이 스펙이니 해외 연수니 취업스터디에 열중할 때, 나는 문청이랍시고 글만 써댔으니 그 당시의 내 불안감과 바닥난 자존감은 처참한 수준이었다. 


그 축축하고 막막한 시절을 견디는 동안 뜨문뜨문, 그러나 결코 사라진 적 없던 기억이 바로 4층 무당 할머니의 말이었다. 잘 살 것이다. 쓸데없는 걱정 말고 그냥 살면 된다. 스물넷의 여름, 그 장면을 떠올리면 괜히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그 무당집이 지금도 그 자리에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그 낡은 건물 자체가 허물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스물넷에 들었던 예언인지 덕담인지 모를 그 말은 내 지난한 글쓰기의 나날 동안 든든한 비빌 언덕이었다. 솔직히 말해, 아직까지도 그 말이 맞아떨어진 건지는 잘 모르겠다. 요즘도 글쓰기와 생계에 대해 고민이 끊이질 않으니까. 이 정도면 잘 사는 거라고 해도 되는 걸까? 아닌 것 같기도 한데.  


그래도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여차여차 난관을 헤쳐 왔고, 그 사이사이에는 다행스럽게도 풀린 다리로 쓰러져도 비빌 언덕 하나쯤은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 할머니야말로 가장 용한 무당이었는지 모른다. 한 마디 말로 수년을 견디게 하는, 곱씹을수록 힘이 되는, 예언에 운명을 내맡기기보다는 그 기분 좋은 예언대로 되기 위해 부단히 살아내게 만드는. 


그 덕에 지금까지도 신점을 본 적이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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